"놀러 가고 싶어~"라고 징징거리면서도 장소를 알아보는 것마저 귀찮아 주말이면 그냥 침대에 눌어붙던 요즈음. 이런 저를 가엾게 여겼는지 천사 같은 <씨네21>에서 전주국제영화제에 데려가 주었습니다. 광고주를 대상으로 각 회사에서 한두 명을 초대하는 행사였는데, 먹고 자고 놀고 보는 비용을 전액 <씨네21>에서 부담.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수야 없죠! 같은 팀의 선배와 함께 부랴부랴 짐을 꾸려 토요일 아침 일찍 양재역으로 달려갔습니다. 여러 회사에서 오셨는데, 인사할 틈도 없이 버스 출발. 아침을 거르고 모인 사람들을 위해 주최측에서 이삭토스트와 음료수, <씨네21> 최신호를 나눠주어 찡 하니 감동했습니다. ![]() 다음에 본 영화는 네기시 기치타로 감독의 <사이드카의 개>. 다케우치 유코가 유부남 애인의 자식들을 보살피는 '언니 겸 엄마' 역으로 나옵니다. 상영 시작 직전 무대에 오른 네기시 감독이 "한국 관객들은 보통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끝에 한 장면이 숨겨져 있으므로 마지막까지 지켜봐 주세요."라고 당부하더군요. ^^ 잔잔하면서도 군데군데 정신없이 웃긴, 작고 따뜻한 작품이었습니다. (다케우치의 애인 역으로 나온 아저씨는 <키사라즈 캐츠아이>의 '오지' 같던데...정보가 없어서 확인을 못하겠네요.) ![]() 프로그램을 훑으며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고...하고 아쉬워했지만 영화는 이 두 편으로 끝이었고, 이후 식사와 술자리. 다음 날은 내소사에 다녀왔습니다. 죽 이어진 전나무 길에서 세포가 알알이 씻기는 기분을 만끽하고, 차분히 절을 돌아본 다음 내려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많이 막혀 논현역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어요. 피곤했지만 아주 즐거운 1박 2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여행에서 진정 대박이었던 것은 영화가 아닌...바로 전주의 음식! 전주에 간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다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라고 하더군요. 사실 전 부모님이 전라도 분들이어서 그쪽 동네 손맛에는 익숙한 편인데, 그럼에도 전주의 먹을거리에는 정말로 정말로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뭘 먹어도 상상 이상으로 훌륭해서, 맛의 기준이 확 바뀔 정도였어요. 젓가락을 댈 때마다 고기가 툭툭 떨어져 나오던 '다락방'의 감자탕, 입안에 머금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던 '왱이집'의 콩나물국밥(이번 여행의 최고 히트!), 쌀알이 혀 위에서 사르르 녹던 '원조바지락'의 바지락죽과 매콤상큼한 바지락회...지금도 생각하면 절로 침이 고이네요. 특히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의 모주(母酒)를 공짜로 퍼주고 뻥튀기도 한 줌씩 가져가게 해주고 콩나물까지 바리바리 싸준 왱이집은 나중에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먹는 내내 선배랑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를 연발하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렸답니다. ^^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배려해서 여행을 한껏 즐길 수 있게 해주신 <씨네21>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상쾌한 바람과 양분으로 듬뿍 충전되어 기운이 납니다. 부산국제영화제 때도 같은 이벤트를 한다고 하던데, 그때도 데려가 주시면...안 될까요? (뻔뻔) ![]() 어느 한쪽을 골라야 한다면 저는 기무타쿠입니다. 오다기리 죠가 아니라. 원작 드라마의 팬이기도 해서, 처음에는 <히어로>를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일부러 한국까지 납시었던 김횽 뻘쭘하게스리 빨리도 내렸더군요. 내가 그렇지 뭐 하고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며 꿩 대신 닭으로 <도쿄타워>를 보러 갔습니다. 얼마 전 명동으로 이사한 스폰지하우스로요. 사실 전 오다기리 죠가 좋은 배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괜찮은 그릇이라고는 생각하죠. 어디에 끼워넣건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리는. 거기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근사한 그림이 되니 그 이상 바라는 건 사치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딱히 대단한 기대는 없이 오다기리 죠의 늘씬한 몸매나 감상해보자고 간 거였어요. 원작 소설이 '히라가나로 쓰인 성서'니 뭐니 극찬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베스트셀러(특히 일본의)를 전혀 믿지 않는 배배 꼬인 성격이기도 하고요. 영화는...생각했던 그대로의 내용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정석의 신파였습니다. 사회가 어려우면 반드시 가족 드라마가 히트를 친다고 합니다만(외환위기 때의 베스트셀러 <아버지>처럼) 일본인들도 어머니 옷주름에 얼굴을 묻고 실컷 울고 싶을 만큼 지친 모양이네요. 빈정거리는 건 아니에요. 저도 중반부터 엄청 울었답니다. 특히 제 경우 주인공처럼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어머니의 기대에 못 미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그만큼 갚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장면 장면이 무척 아팠어요. 주인공이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라며 흐느끼는 부분에서는 뭐...거의 쪽팔릴 정도로 통곡했다고 밝혀둡니다. 그러나─어김없이 잘난 척해서 죄송합니다만─결국 거기까지예요. 신나게 울고 나와서 "집에 가면 엄마한테 잘해드려야겠어"라며 동행인과 얘기하고, 그러고는 오다기리 죠의 패션과 몸매에 대한 화제로 감상이 마무리됩니다. 원작도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에서 크게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다만 한 가지 인상 깊은 부분이라면 마지막 장면, 차라리 홀가분해 보이는 주인공의 표정이었어요. 어머니를 살리려던 그의 노력과 가슴을 찢으며 쏟아진 슬픔은 어쩌면 부모의 죽음을 순환의 필연으로 납득해버리는 자신에 대한 죄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지만 영화는 신파를 '촌스럽지 않게' 다루기 위해 지나치게 조심한 나머지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는 것은 영화 자체의 힘보다는 관객 저마다의 가슴에 들어 있는 부모의 존재일 테죠. 그렇기 때문에 그 눈물은 극장을 나섬과 동시에 깨끗이 휘발되는 거고요. 가끔 가슴을 축축하게 만드는 좋은 장면이 있었고, 카타르시스라는 점에서도 나름의 임무를 완수한 셈이지만 오다기리 죠의 분홍색 스웨터와 땡땡이 머플러 이상으로 남는 건 없는 서운한 영화였습니다. ![]() ![]() 덧 : 어머니의 유품 상자를 열고 흐느끼는 주인공을 보면서 문득 <가족의 탄생>에 나온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제게는 끝내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했던 선경(공효진)의 히스테릭한 울음 쪽이 더 리얼하게 다가왔습니다. 덧2 : 그러고보니 저는 <가족의 탄생>과 같은 맥락에서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도 좋아해요. 아무래도 어머니-아들과 어머니-딸 사이의 드라마는 다른 식으로 그려지고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네요. ![]() 처음 '일ㆍ인ㆍ페' 일정표를 봤을 때는 오늘 스폰지하우스에 가서 이 <3번가의 석양>을 시작으로 <첫사랑>, <인 더 풀>, <파빌리온 살라만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까지 종일 보고, 다음 주말에 <키사라즈 캐츠아이>를 비롯한 나머지를 싹 쓸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감기에 걸린 데다가 오후에 약속이 생겨서...아침 일찍 나가 <3번가의 석양>만 보고 아쉽게 돌아왔습니다. 원체 지식도 상식도 없고 견문도 짧은 터라 이 영화의 원작이 유명한 만화라는 것도, 호리키타 마키가 도호쿠 사투리를 쓰는 순박한 시골 소녀로 등장한다는 것도, 2005년 일본 아카데미를 휩쓴 화제작이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니, 그런데 '인디필름'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나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순수하게 울다가 웃다가 감동할 수 있었으니까요. ![]() 영화의 배경은 1958년. 아직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지만 사람들은 하루하루 올라가는 도쿄타워를 보며 번영의 예감을 그리고, 전차가 유유히 도로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그 곁을 스쳐가는 자동차의 수는 날로 늘어갑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존의 훈장을 가슴에 단 듯 씩씩한 3번가 사람들은 오늘도 옹기종기 붙어앉아 싸우고, 웃고, 인정을 나누며 일상을 쌓아올립니다. 성격은 불 같지만 본성은 착한 자동차 정비사 스즈키 노리후미(츠츠미 신이치). 그는 이력서에 적힌 '특기 : 자전거 수리'를 '자동차 수리'로 잘못 보고 순박한 소녀 무츠코(호리키타 마키)를 조수로 채용합니다. '자동차 회사'라는 말에 속아 상경한 무츠코는 기름때에 찌든 좁은 정비소에서 볼트를 조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즈키와 대판 싸우기도 하지만, 스즈키 일가의 따뜻하고 활발한 품성에 이끌려 어느새 한 가족으로 어우러집니다. ![]() 한편 아동지에 3류 모험소설을 연재하며 생계를 잇는 작가 지망생 차가와 류노스케(요시오카 히데타카)는 매력적인 술집 아가씨 히로미(코유키)의 꼬드김에 넘어가 히로미 친구의 아들 준노스케(스가 켄타)를 떠맡게 됩니다. 갈 곳 없는 준노스케를 박대하던 차가와는 준노스케가 그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이 어린아이에게 뜻밖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의 재능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준노스케의 스토리를 그대로 베껴 쓰는 등 뻔뻔스런 짓까지 하던 차가와는 점차 준노스케에게 따뜻한 애정을 품게 되고,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히로미도 차가와에게 이끌립니다. ![]()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닌 히로미, 준노스케, 차가와. 이렇게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시대의 풍경이 겹쳐집니다. '콜라'라는 음료가 새로 나왔다며 맛있게 마시는 담배가게 아줌마에게 "간장 다 마시고 확 죽어버려라"라고 투덜대는 스즈키 씨, 스즈키 씨네 집에 텔레비전이 처음 들어오던 날 우르르 몰려와 역도산의 시합을 보며 열광하는 마을사람들, 집집마다 냉장고가 들어오자 쓴 표정을 지으며 페달을 밟는 얼음장수 아저씨... ![]()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입니다. 일본영화다운 은근함은 찾아볼 수 없고, 말도 행동도 감정도 솔직하게 우르르 쏟아집니다. 울어야 하는 타이밍에는 "괜찮아, 이런 장면에서는 당연히 울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고, 웃긴 장면에서는 "웃으라고 넣은 장면이니까 마음껏 웃으라고!"라며 충동질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는 이런 꾸밈없는 솔직함이 잘 어울립니다. 함께 간 아가씨는 "마치 연극 같았다"라고 했는데, 적절한 평이라고 생각해요. 준노스케의 출생의 비밀, 히로미와 차가와의 사랑과 이별, 차가와가 준노스케에게 느끼는 뜨거운 부정(父情)은 자칫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것이 될 수도 있는데 에두름 없이 눈앞에 달려들기 때문에 연극을 보듯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 놓인 한 장의 막이 걷히고 배우들의 희로애락이 투명하게 와 닿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부분에서는 절제를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부끄러워집니다. 3번가에서는 사랑도, 분노도, 눈물도, 웃음도 분명하고 큼직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거든요. ![]() ![]() 나쁜 사람도 없고, 크게 비극적인 사건도 없고, 슬픔도 곧 기대와 희망으로 바뀌는 세계.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펑펑 오고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의 방에 찾아가 선물을 놓고 저녁에는 아름다운 석양이 짙게 깔리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들이 가족처럼 뜨겁게 서로를 끌어안는 세계. 그런 세계는 동화일지도 모릅니다. 혹자의 평대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외면하고 번영에 대한 향수만을 내세우는' 무책임한 드라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의뭉과 계산이 미덕으로 통하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꾸밈없는 감정에 젖을 수 있다면, 그게 두 시간짜리 환상이라 해도 저는 기꺼이 취할 거예요. 덧 : <철콘 근크리트>는 매진이더군요. 함께 간 아가씨는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이거 오타 아냐?"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답니다. ^^ |
카테고리
이글루 파인더
최근 등록된 덧글
오랜만에 덧글 남깁니다...
by 당근 at 08/19 노르웨이의 숲 영화는 잘 .. by 나르실 at 08/04 한길세계문학 시리즈 목차.. by EREBUS at 07/11 주신 슌킨쇼는 정말 좋았.. by 치이나 at 07/04 아아 하긴...크게 흥행은.. by 루리루리 at 07/04 영화가 개봉해서 그런 거 .. by 치이나 at 07/04 Starless님/ 네...게임.. by 루리루리 at 07/04 코즈믹 환타지! 와와와~ by 나르실 at 06/28 저 시기에 나온 SF모험.. by Starless at 06/28 시절이 하수상하여 (실은 .. by 나르실 at 06/05 최근 등록된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