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사냥 보고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좌절을 극복하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은 루리루리입니다. 별반 대수롭지 않은 글이었지만 그것 쓴다고 날마다 하던 운동도 빼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크로스 카운터로 한방씩 사이좋게 주고받은 뒤 몸을 바로세울 틈도 없이 레프트 라이트 차례로 먹고, "큭...네 펀치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은 건 아마 내가 처음일 거다" 운운하며 비틀비틀 자세를 잡으려는데 직빵으로 어퍼컷이 들어와 눈물과 코피를 포물선 모양으로 쏟으며 날아가는 허리케인 마사루의 기분이로군요(의불). 건방지다고 벌 받았나...월요일 헌책방에서 책을 서른두 권 사온 뒤 이틀 동안 열 권이나 읽었다고 자랑하던 참이었거든요. 그치만 누구라도 프라이드는 가지고 살아야 하잖아요! 천연 게으름뱅이 루리루리가 하루에 다섯 권 꼴로 책을 읽고서 성실하게 독후감을 쓴다면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잖아요! 그걸 가지고 자랑 좀 했다고 글을 통째로 날려 버리시다니, 전두환님하느님 심술쟁이~T_T

그래서 이를 교훈으로 삼아 보다 겸허해지기로 작심했습니다. 겸허 모드 루리루리의 겸허한 헌책 쇼핑&독서 보고서.

2004년 7월 23, 24일-
경기도 부천시에 사는 Y양(통칭 루리루리)은 25일 20만원 가량의 돈이 들어오는 것만 믿고, 겁없이 그 중 15만원을 책값으로 지출하기로 함. A, B, C 세 군데의 인터넷 헌책방에 총 마흔여섯 권의 책을 주문하다.

2004년 7월 25일-
돈 못 받음. 쪼꼼 좌절.

2004년 7월 26일-
돈 받음. B, C 계좌에 입금하기 전, 집앞에 있는 A에 먼저 책을 찾으러 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새책 재고들을 반값에 팔고 있었음. "학상~안쪽엔 더 좋은 게 있어~"라는 아저씨의 은근한 권유에 "아니 이러심 안 되는데...정말 안 되는데..."하면서도 질질 끌려들어가 구경.

그 결과...

당초 A에서는 이 정도만 살 계획이었던 게...

이렇게 됨.


OTL


B, C에 입금할 돈까지 다 써버린 그녀. 서른두 권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다. 다른 두 곳의 주문 취소. 희비가 교차하다.

그날 읽은 책들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책 읽어주는 여자>
<궁핍한 시대의 희망, 영화>
<히즈라>
<마구스> 1권

2004년 7월 27일-
읽은 책들 :
<마구스> 2, 3권
<예수의 제 2복음> 1, 2권
<그리스 비극> 1권

2004년 7월 28일-
p.m.3:00 : 무비플러스에서 방영한 '할리우드 랭크 25 : 2002년 최고의 연예인' 중 10위인가 11위에 토비 맥과이어가 낀 걸 보고 감격, 또 감격. 참고로 1위는 제니퍼 애니스톤이었음.

p.m.5:00~6:00 : 어머니와 함께 홈쇼핑 시청. 어머니를 졸라 오삼(오징어+삼겹살)불고기와 건과일 세트 5종을 사다.

p.m.6:00~7:30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읽다. (재독)

p.m.7:30 : 간만에 이글루 포스팅을 하기로. 열심히 쓰기 시작.

p.m.9:00 : 동생(男)이 거실에서 야매로 쌍커풀 수술 받음.

p.m.9:40 : 완성! '글 올리기' 버튼을 누르려는데 느닷없이 익스플로러 오류 발생. 모니터를 두들기며 짐승처럼 울부짖다. 키보드를 쾅쾅 쳐대는 소리에 거실에서 수술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웬일인가 싶어 몰려옴. 바보, 바보, 바보같은 메가패스. 멀쩡하던 컴퓨터가 왜 전용선을 바꾸자마자 오류의 천국이 되냔 말야!

p.m.10:30 : 감자 네 개를 먹고 비비빅 하나로 입가심한 뒤 원기 회복.

2004년 7월 29일-
a.m.12:10 : 다시 쓰기 시작.

...이상이 사건(?)의 전말입니다만...쓰고 보니 전말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구만. 날아가기 전에는 읽은 책마다 감상을 썼습니다만, 다시 그 짓은 못하겠어요T_T

다음은 구입한 책들의 상세.
문학입니다.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토마스 만, 민음사)
<카프카전집 1권 : 변신>(프란츠 카프카, 솔)
<그리스 비극 1권>(아이스킬로스ㆍ소포클레스, 현암사)
<그리스 비극 2권>(에우리피데스, 현암사)
<보리스 고두노프>(푸시킨, 열린책들)
<책 읽어주는 여자>(레몽 장, 세계사)
<전락>(알베르 카뮈, 책세상)
<도시는 불빛을 먹는다>(J.맥키너니, 한겨레)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하인리히 뵐, 문덕사)
<수도원의 비망록 1, 2>(주제 사라마구, 문학세계사)
<예수의 제2복음 1, 2>(주제 사라마구, 문학수첩)
<마구스 1, 2, 3>(존 파울즈, 문학동네)
<시귀 1, 2, 3>(오노 후유미, 들녘)

인문ㆍ사회ㆍ자연과학입니다.

<변신이야기>(오비디우스, 민음사)
<총, 균, 쇠>(제레드 다이아몬드, 문학사상사)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폴 데이비스, 정신세계사)
<히즈라>(세레나 난다, 한겨레)
<천안문>(조너선 D. 스펜스, 이산)
<노동의 종말>(제레미 리프킨, 민음사)
<제국의 시대>(에릭 홉스봄, 한길사)
<중국신화전설 1, 2>(위앤커, 민음사)
<장자>(오강남 번역 및 해설, 현암사)
<궁핍한 시대의 희망, 영화>(열화당 영상 자료실, 열화당)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김진송, 현실문화연구)
<신라화랑의 체육사상 연구>(이진수, 보경문화사)

그건 그렇고 파울즈의 <마구스>도 좋았지만(읽을수록 답답해지는 걸 빼면)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 2복음>은 정말 굉장한 책이더군요! 이런 주제엔 얼마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배꼽을 쥐고 읽게 될 줄이야...만담가 하느님 너무 좋아요>_<)b 물론 사라마구의 소설답게 그저 가벼운 패러디가 아니라, 신에게 이용당한 예수의 인성을 최대한 부각함으로써 도리어 신적 인간의 고귀함을 감동적으로 드러내 보인 명작입니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노먼 메일러의 <예수의 일기>,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 등 여러 종류의 신약성서 재해석ㆍ패러디 소설들을 읽었고,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진 뛰어난 작품들이었지만, 이 소설은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무지무지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남는 것도 많은 책이므로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음, 유치원생 수준의 추천이다...;)

다음은 이 책의 분위기를 잘 알려주는 몇몇 장면들.

마리아 : 제 첫 아이를 잉태하게 한 것이 바로 주님의 씨앗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천사 : 음, 그것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문제다. 네가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씨앗과 네 남편의 씨앗이 합친 상태에서 친부 확인을 하자는 말인데, 수많은 분석과 테스트를 거치고, 유전상의 비슷한 점을 찾아본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것은 결코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라든가,

예수 : 하지만 주님께서 가지신 권능으로 세상에 나가 직접 다른 나라와 민족들을 정복하시는 것이 더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 : 이런, 나는 그렇게 못한다. 신들 사이에는 직접 간섭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는 계약이 있다. 내가 광장에서 이교도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은 옳지 않고 나야말로 진짜 신이라고 설득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은 신이 다른 신에게 할 일이 못 된다. 게다가 어떤 신도 다른 신이 금지된 자기의 신전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 : 그래서 대신 인간들을 이용하시는 겁니까?

하느님 : 그래, 맞다.


또는,

하느님 : 모든 사람들이 유혹에 굴복하고 사악한 생각을 즐기고, 규칙을 어기고, 크든 작든 죄를 짓고 곤궁한 영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을 태만히 하고, 신앙에 저촉되고, 사제들을 화나게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네가 할 말이라고는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이것뿐이다.

예수 : 겨우 그것 때문에 당신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언자를 보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 : 이제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들을 때는 지났다. 이제는 좀 더 강한 처방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예수 :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처럼요?

하느님 : 그래, 안 될 것도 없지 않느냐?


뭐랄까, 그 자체로는 가슴을 울리는 구도소설인데...읽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니 고약한 노릇이지요. 참 짓궂은 사람입니다, 사라마구 씨. 그치만 그 점이 바로 매력이에요♡
by 루리루리 | 2004/07/29 01:25 |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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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미로 at 2004/07/29 03:31
앗. 오노 후유미'ㅁ' 좋아요. 유니스의 비밀- 도 그렇고, 전 뭔가 '이 사람 성격이 이렇고 저렇고' 라든지 '이 사람 심리가 이래 저래' 해서 문제 터지는 이야기가 좋은가 봐요 ㅠ ㅠ 아유;; 취향.
그리스 비극 좋아요. 고등학교 때 완전히 푹 빠져서는 허우적 거렸지요 ㅠ ㅠ 아아 프로메테우스...(...)
'예수의 제2 복음' 재미있겠다 ㅠ ㅠ 정말...
.............루리루리님 나빠요!(울며 달려간다)
Commented by poirot at 2004/07/29 19:35
서른두권..역시 -_-)=b
Commented by Rimi at 2004/07/30 00:25
오노 후유미...개인적으로 일본 장르문학 작가 중에 가장 좋아하는 분이지요..저번 일본 여행 때 시귀 전집을 돈이 부족해서 사지 못했던 게 지금도 못내 아쉬워요. 개인적으로 12국기 시리즈는 물론이요 동경이문, 흑사의 섬 같은 작품들은 정말 걸작이라고 생각하는데...루리루리님도 오노상의 작품들을 좋아하시나요? *ㅅ*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4/07/31 00:30
세상엔 정말 좋은 책이 많군요.;;;
Commented by 웹퍼 at 2004/07/31 05:39
재밌는거 정말 많이 사셨네요. 저도 헌책방 도는 것 최근에야 즐기게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7/31 05:55
미로님/ <유니스의 비밀>을 읽으셨군요! 좋은 책이죠. 저도 그거 보고 루스 렌델이라는 작가에게 홀딱 반했답니다. <내 눈에 비친 악마>도 좋은 소설이었지만 역시 유니스가 최고예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한번 보고 싶네요.

그리스 비극은 읽노라면 귓전에서 코러스가 맴도는 느낌이 정말 좋죠.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같은 경우 그 대담무쌍한 현대성이 지금 보아도 눈부실 정도고요=)

<예수의 제2복음>, 정말 재미있는 책이에요. 미로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꼭 사서 읽어야 할 책이에요. 걱정 마시고 절 믿고 콱 지르세요, 지르세요, 지르세요...(최면중)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7/31 06:01
poirot님/ 아뇨아뇨 부끄럽습니다/// 그저 난잡하기만 한 취향이라...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7/31 06:05
Rimi님/ 실은 오노 후유미의 소설은 아직 한 권도 읽은 게 없어서요. <시귀>가 마음에 들면 하나하나 읽어볼 생각입니다. <십이국기>도 한참 칭찬이 자자할 때 괜히 반골 기질이 발동해서 안 읽었거든요^^; Rimi님이 적극 추천하시니 기대가 되네요. 다 읽으면 짧게라도 감상 올리겠습니다.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7/31 06:06
잠본이님/ 정말이에요.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은데, 인간, 수명은 짧고 돈은 없으니...(우울)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7/31 06:08
웹퍼님/ 아앗, 그렇다면 웹퍼님은 제 라이벌!(웃음) 헌책 중에는 귀한 게 많다 보니 정말 누가 먼저 발견하느냐의 문제로 결정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 짜릿함에 한번 중독되면 벗어날 수가 없죠>_<;
Commented by 이재훈 at 2004/08/25 13:57
저도 부천시에 사는데, 부천시에도 아직 남아있는 헌책방이 있습니까?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8/26 08:48
엄밀한 의미에서 부천은 아니고 인천이에요. 부천 상2동 길 하나 건너 부개동...부개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고가도로를 따라 내려오시다 보면 맞은편에 바로 있습니다. 약도 보시면 찾기 더 쉬우실 듯.

http://www.booksarang.com/content.php?co_id=company

인터넷에서 선주문하시고 찾으러 가셔서 겸사겸사 매장 한 바퀴 둘러보시면 더 좋을 거예요. 온라인에는 올라와 있지 않은 재고품들도 꽤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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