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튼 서양인이 쓴 중국 이야기를 보는 건 참 묘한 기분이라, 평소엔 내 옆집인 양 거리감 없던 중국이 갑자기 이국성을 뒤집어쓰고 다가오는 느낌이랄까요. 분명히 무대가 중국은 맞는데 생판 모르는 나라 얘기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어색하기만 한가, 그건 또 아니고, 권말의 후기에서 저자가 직접 밝혔듯 많은 자료를 통한 면밀한 고증으로 당대의 분위기를 잘 살려놓았습니다. (다만 주지해야 할 것은 무대는 당나라인데 복식이나 풍습 등 생활상은 명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 디 군수를 주인공으로 삼은 명나라 때의 탐정소설들이 시대적 배경은 놔두고 소소한 부분들은 자기네 실정에 맞게 개작한 점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 합니다) 사실 우리라고 한들 그 시절 중국의 문물에 대해 뭐 그리 아는 게 많겠습니까. 직접 펜을 든대도 어차피 타국인이니 더 나을 것도 없겠죠. 그런데 진짜 명대의 문학 작품인 양 각 장마다 ‘재산이 많은 선주가 신부를 잃어버렸다고 하소연한다. 디 군수가 두 사람의 만남을 곰곰 되씹어본다’라는 식의 요약문까지 달 정도로 구석구석 신경을 쓴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느냐, 아마 그건 작중 ‘한국인’에 대한 묘사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작품에서 ‘한국인’들은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비운의 여인 유수를 비롯하여 선박 회사의 지배인인 김상(저자가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째 상당히 무성의한 작명인 듯 여겨집니다만...-_-)이나 살인에 개입한 옻칠 인부 등 여러 종류의 한국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때의 한국이란 어디까지나 고구려 백제 신라란 말이에요. 그러니 자꾸 한국인 한국인 하는 게 거슬릴 수밖에 없지요. 예컨대 유수만 해도 고구려가 멸망하는 바람에 당에 포로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한복을 입고 머리를 쪽진 거야 기왕 명대의 풍습을 쓰는 김에 조선에 대한 자료를 끌어왔는지도 모르니 그렇다 치더라도, 어쨌든 상당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에요. 고구려라는 마이너한 나라 이름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겠지만...굳이 그게 흠이라고 물고 늘어질 생각도 없지만...아아 그래도 읽는 동안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하긴 우리가 다른 나라를 보는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죠. 인도는 고대에도 ‘인도’였고, 중세에도 ‘인도’였고, 근대에도 ‘인도’였던 것만 같으니. 그 점에선 저도 엄청난 죄인이에요(웃음). 그럼 추리소설로서의 퀄리티는 어떤가―사실 이게 본론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처음 펭라이로 부임한 디 군수는 전임 군수 독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언뜻 무관한 듯 보이는 몇 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결국 디 군수는 ‘군수 살인사건’ 외에 ‘달아난 신부 사건’과 ‘불량배 살인사건’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매듭이 하나하나 풀려감에 따라 세 사건의 배후에 놓인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밝혀지는 비밀... 재미있는 구성이죠? 이것도 ‘주인공이 세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전혀 다른 사건을 동시에 해결하도록 되어 있는’ 명대 탐정소설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다소 어수선한 감은 있지만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리면서 사건들 사이의 연결 고리가 뚜렷해지는 모습이 꽤 흥미로워요. 무엇보다 소재가 특이하니 잘만 손대면 아주 푸짐한 성찬을 차려낼 수 있을 법하죠. 몇 가지 사건이 얽히는 틈새로 액션씬도 들어가고 짧지만 로맨스도 있고 귀신도 등장하고 종교와 고위 관리가 개입한 거대 음모도 있으니 이만한 원석들을 가지고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한다면 작가의 기량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더구나 핵심인 추리도 대부분 옛 문헌들에서 빌려왔다는데, 이 정도면 드라마를 얼마나 재미있고 극적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결정된다고 봐도 좋겠지요. 그럼 과연 이 소설은? 지금까지의 제 말투에서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앞에서 열거한 매력들을 제대로 살렸다고는 보이지 않아요. 일단 주인공인 디 군수만 봐도, 인간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데 지대한 흥미를 갖고 있으며 다도를 좋아하고 무예에 능한 동시에 기민한 행동력과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사람인데, 이런 설정들을 한 몸에 갖추고서도 전혀 입체적으로 느껴지질 않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요컨대 저자는 디 군수라는 실재인물에게 매료되어 그를 현대에 되살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새 육체를 부여하는 대신 엑토플라즘 상태로 허공에 방사한 것뿐이에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라 시종 바쁘게 뛰어다니는데도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처럼 장면 속에 고정된 것처럼 보여요. 이건 아무래도 반 훌릭 박사가 자신의 창의력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대신 400년 전 소설들을 어떻게 하면 그럴싸하게 흉내내어 재구성할 수 있을까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빚어진 결과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 사건의 내용과 트릭은 거의 문헌에서 빌어오다시피 했고, 논문과 관련 서적에서 얻은 지식만으로 인물을 창조하려 했으니 평면적이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어설픈 느낌이 들 수밖에요. 더구나 제대로 추리다운 추리는 거의 등장하지도 않아요. 디 군수가 호통만 치면 알아서 진실이 굴러 들어오는 꼴이거든요. 이게 정말 <판관 포청천>이라면 그것으로도 족하겠지만, 일단은 ‘당나라의 셜록 홈즈’라는 선전 문구를 앞세워 정통 추리소설을 표방하고 있으니 문제가 되는 거죠. 얽히고 설킨 세 가지 사건을 찢으며 진정한 배후가 나타나는 구성은 좋았지만, 사건들 간의 개연성도 좀 떨어지고 불필요한 부분도 많고...느낌표의 지나친 남발도 눈에 거슬리고, 막힌다 싶은 곳은 억지스럽게 처리해 버렸다는 생각도 들어요. 여러모로 아쉬운 소설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정말 매력적인데 말이에요. 나중에 모 출판사에서 이 책과 더불어 ‘중국 무쇠종 살인사건’과 ‘미궁 살인사건’등 디 군수가 활약하는 시리즈 전부를 내놓을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나오면 살지 안 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 읽어볼 것 같긴 합니다. 다른 책들은 단순한 모방을 뛰어넘어 추리의 묘미를 잘 살렸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은근히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해서^^; 어쨌든 ‘살인’과 ‘수수께끼의 해결’만 나오면 무조건 추리소설이 되는 게 아니라는 모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평점은 별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반이 되겠습니다~ 덧 : 고구려 여인 유수가 죽기 전에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치는데, 아아 그때의 그 스멀스멀한 위화감이란; 덧2 : 디 군수의 본명이 '티 젠치에'라고 해서 처음엔 누군가 했더니, 적인걸(狄仁傑)-즉 바로 이 양반이군요! 오호 용모가 수려하십니다 군수님>_< 덧3 : 반 훌릭 박사는 까치에서 나온 <중국 성풍속사>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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