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불로장수의 영약'은 돈 주앙 전설의 변주입니다. 방탕한 미남 청년 돈 주앙은 임종의 침상에 누운 아버지에게서 그를 부활시킬 수 있는 불로장수의 영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언을 수행하는 대신 훗날 자신이 쓸 요량으로 약을 꿍쳐두고, 혹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까봐 신심 깊은 여인과 결혼하여 선량한 아들을 낳습니다. 마침내 나이를 먹어 죽음을 앞둔 돈 주앙은 아들을 불러 영약이 든 병을 건네주며 자신의 사후 시신에 약을 고루 바를 것을 명하는데... 자못 발자크다운 감칠맛이 넘쳐 흐르는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만큼 즐겁게 읽었습니다. (주인공에게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그 비극성마저도 조롱하는 듯한 돈 주앙의 시니컬한 해학이 매력 만점이었습니다. '주민들에 의해 증언된 불가사의한 사건'의 작가 D.F.드 사데는 이름만 보고는 이게 누군가 싶었는데, 생몰 연도를 보아하니 전설적인 반항자 마르퀴 드 사드 후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악마와의 계약을 다룬, 이른바 파우스트 전설의 변형인데, 사드답지 않게 결말이 퍽 교훈적입니다. 뭐 해설에 나온 대로 불가지론적인 아퀴가 사드풍이라면 그런 것도 같지만. 테오필 고티에의 '오뉴프리유스 또는 어떤 호프만 숭배자의 환타스틱한 초조'는 악마의 농간에 파괴되는 예술가의 몰락을 그려내는 듯...싶다가, 막판에 그것을 정신병리학적인 현상으로 역전시키는 기교가 꽤나 인상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요컨대 오뉴프리유스와 같이 극도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인간은 언제나 '훌륭한 시인'과 '색다른 광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으며, 한끗 차이로 상반된 운명에 지배될 수 있다는 이야기겠죠. 자비에르 포르누레의 '백치와 그의 하프'는 세상에서 버림 받은 가련한 백치가 한 하프 연주자의 혼을 담은 연주로 미의 본질을 깨닫고 행복감 속에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적으니 어째 진부한 듯싶지만 꽤 감동적이었어요. 제라르 드 네르발(집요하게도 목차에까지 '에르발'이라고 표기했더군요;)의 '악마의 초상'은 여인에게 버림 받은 화가가 '악마의 약혼녀'를 그린 초상에 집착하다가 광란 상태로 파멸한다는 얘기인데, 사실 많이 싱겁습니다. 개인적으로 초상화 괴담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쉬웠습니다. 조금만 더 재밌게 써주지... 쥬르 슈페르비엘의 '바다 위의 소녀'는 참으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바다 위의 마을에 한 소녀가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곳의 유일한 주민으로, 지독한 고독 속에서 나이를 먹지도 않고 친구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가 다가올 때마다 소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소리를 지르지만,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연민을 느낀 파도가 거품으로 소녀를 감싸 안식을 선사하려 하지만 그녀는 죽지조차 못합니다... 제라르 클랭의 '괴물'은 이 책에 수록된 유일한 SF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소설입니다. 고독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부부. 그들의 평온한 일상은 어느 날 근처 공원에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가 나타나면서 깨집니다. 일터에서 돌아와야 할 남편이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조차 없자, 불안에 젖은 아내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미지와의 조우'를 중계하는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때 그녀는 외계 생명체가 입을 열어 남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게 됩니다. 급히 공원으로 달려가는 아내.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비밀은!(랄까나~) A.드 빌리에르 드 리라담의 '베라'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으로, 아내를 잃은 남편의 집요한 정념이 그녀의 영혼을 죽음의 왕국에서 끌어낸다는 내용입니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흐르는 듯 서정적인 묘사가 아름다워요. 그나저나 환상소설과 추리소설의 부부관이란 정말 어마어마하게 다르군요. 한쪽은 "너무 사랑했는데 그녀가 날 두고 가버렸어~"라는 신파조의 타령이고, 한쪽은 "저 년(놈)을 어떻게 죽이면 소리소문 없이 잘 죽인 게 될까"라는 음험한 연구 일색이니 재미있지 않습니까. 참고로 주목할(?) 만한 것은 베라 백작부인의 사인. '이 사랑스런 여인은 깊은 쾌락 속에 실신하고 감미로운 포옹 속에 자신을 잃은 나머지, 심장이 더없는 환희에 부서져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라니, 이거 짤없이 복상사 아닙니까; 기 드 모파상의 '오르라'는 예전 <모파상 괴기소설 : 광인?>이라는 희한한 제목의 책에서 이미 읽은 바 있으므로 코멘트 생략. 속편도 있죠 아마... 마르셀 슈와브의 '미이라를 만드는 여자들'은 어렸을 적 아동용 호러 앤솔로지에서 재미나게 읽었던 단편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음산하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매력 포인트. 쟝 로랑의 '가면의 구멍'은 <가면을 벗으면 아무것도 없다>라는, '존재의 허무'에 대한 익숙한 변주. 가면은 호러물에 써먹기 딱 좋은 소재인데, 개중 제일 뛰어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포우의 '적사병 가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 이 소설을 읽고 어린 마음에도 커다란 감명을 받았더랬죠. 재미있는 것은 바로 앞에 실린 마르셀 슈와브의 소설에 '알퐁스 도데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는데, 이 쟝 로랑의 소설은 '마르셀 슈와브에게'라는 헌사로 장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비밀의 방'은 해리 포터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로...아니 이게 아닌가...작가가 작가인 만큼 스토리보다는 문장과 서술 방식에 초점을 두어 읽어야 할 작품인데, 번역이 구리니 이거야 원; 하지만 그 상태로도 문장의 정묘함은 어디 가지 않아서, 나중에 좋은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은 소설입니다. 죠세핀 페라당의 '클레당의 하프'는 빌리에르 드 리라담의 '베라'처럼 "끔찍하게 사랑했던 마누라가 날 두고 가버렸어 흑흑"이라는 내용. 비록 이 소설의 남편은 슬픔을 접고 새 연인과 함께 다시 출발하려 하지만, 이번에는 <레베카>류의 환영이 스물스물 그들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합니다...그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점 없이 평범한 소설이었습니다. 죠르쥬 로덴바키의 '거울의 친구'는 거울에 비친 반영에 사로잡힌 남자가 그 속의 낙원을 꿈꾸며 유리에 머리를 박아대다가 저세상으로 떠난다는 내용으로, 역시 정신병리학적인 광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끌로드 파레르의 '정적의 밖'은 아편중독자인 묘지기가 마약의 부작용으로 극도로 예민한 광기에 사로잡혀 환각을 경험한다는 내용. 광증의 묘사는 흥미롭지만 그밖에 별달리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나저나 89년에 나온 이 책의 진정 공포스러운 점은, 표지도 아니고 내용도 아닌-내지에 실린 출판물의 광고. <김종필과 새 공화국>이라는 제목 위에 'JP 그 푸른 파도는 다시 친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고, 그 아래 'JP는 永遠하다'라는 부제까지 붙어 있습니다. 아아 말만으로도 무서워 무서워(부들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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