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아팠다
1.
하느님.
지상은 이렇게도 아름답습니다.
전 조금 더 살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 꼽는 나리타 미나코의 <알렉산드라이트>에 나오는 독백. <사이퍼>도 좋았지만 <알렉산드라이트>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전작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소년들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면, <알렉산드라이트>는 그들이 그 날개로 비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 마리 야수와도 같은 주인공 레바인의 불꽃같은 열혈청춘도 보기 즐겁지만 특히 전작의 쌍둥이 중 하나인 시바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 웃으며,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노라면 어느새 나도 살아야겠다고, 그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강인함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니, 보다 정확한 의미에서는, Matt Thorn씨가 말했듯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일.

어제 우울한 마음으로 누워서 모차르트를 듣고 있는데 문득 저 대사가 생각났다. 하느님/지상은 이렇게도 아름답습니다/전 조금 더 살고 싶습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자 교향곡 40번의 선율이 수억 개의 별처럼 하늘에서 쏟아진다. 부끄럽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앙금을 게워내듯이 울었고, 41번 '주피터'가 울려퍼질 때쯤 새롭게 충전되어 깨어났다. 묵은 피가 선율로 갈음되어 살갗 아래서 반짝반짝 빛났다.

세상에 이렇게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내 고통밖에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두 눈을 뽑고 장님으로 살아가는 편이 낫겠지.

2.
'소파에 앉았다. 먼저 하루의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어 어렸을 때의 추억들이 떠올라, 가벼운 우울과 약간 들뜬 기분 사이에서 흔들거렸다. 그것도 지나가도록 놔두었다. 이어 평화가 왔다. 그럴 때 나는 레코드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앉아서 운다. 어떤 특정한 것 때문에, 또는 특정한 사람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인생은 나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 인생이 어떤 식으로든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우는 것은 이 우주에 크레머가 연주하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만큼 아름다운 것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페터 회,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3.
오랜만에 <파이돈>을 다시 읽었다. 대학 입학했을 때 한 번, 서양정치사상 수강 중에 한 번,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읽을 때마다 묘하게 가슴을 치는 부분이 있는데 에케크라테스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파이돈의 답. "그 고장의 사람으로는 아폴로도로스 외에 크리토불로스와 그의 부친 크리톤, 헤르모게네스, 에피게네스, 아이스키네스, 안티스테네스, 그리고 파이아니아의 크테시포스, 메네크세노스, 그리고 그 밖에 몇 사람이 있었지요."에 이어, "플라톤은 그때 아팠던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아팠다'라고 기술한 것은 다름아닌 플라톤 자신이었다. 경애하는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그의 심정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덤덤한 듯한 한 문장으로 '플라톤은 아팠다'라고 적은 그는, 정말로 아팠던 걸까, 아니면 소크라테스를 눈앞에서 떠나보낼 용기를 내지 못해 도망친 걸까? 훗날 펜을 들어 그때를 돌이킨 그는 만감 속에서 이 말을 적어넣었을 것이다. 짧은 단어들 사이에 고통과 회한의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듯해서 <파이돈>을 읽을 때마다 내 눈은 한참 그 부분을 맴돈다.

그런데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지, 후에 푸른숲에서 <플라톤은 아팠다>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이 책에서 젊은 플라톤은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에 몸부림치다 시동 하나를 데리고 동굴로 들어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크라테스의 많은 추종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그는 긴긴 시간 고통을 삼키며 면벽수행을 한 끝에 마침내 스승의 사상을 완성하여 후대에 길이 남긴다...는 것이 작품의 개요. 질적으로는 평범한 편이지만 <파이돈>을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소설이다. 고전 속에서는 이름뿐이던 인물들이 작가의 상상력으로 살을 입고 생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by 루리루리 | 2004/06/16 21:00 | 혼잣말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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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4/06/16 23: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미로 at 2004/06/17 00:12
으아;ㅁ; 일기까지 멋지다니... 반칙이에요 루리루리님 ㅠ ㅠ
(장마에 절어 꾸깃꾸깃한 파이돈을 올려다 보면서.)
Commented by 유서영 at 2004/06/17 01:15
^^음햣. 찾아오느라 힘들었엉 ㅋㅋ
나 싸이 열었엉. 널러와~
그나 저나. 잘 살구 있는겨? 궁금시려.
난. 그냥 그렇게 부대껴 살고 있엉..
Commented by Starless at 2004/06/17 18:02
책 잘 받았습니다. 이제 앞부분 보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을 것 같군요. 이벤트 감사드리고 다 보면 홈에 감상이라도 올려야겠습니다.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17 22:56
y님/ 앗, 정말! 그러고 보면 브람스 교향곡 1번에도 비슷한 톤의 기침소리가 들어가 있어요! 베토벤 교향곡 9번 바이로이트 실황에도 있는데, 이쪽은 약간 톤이 높고...와하하 그런데 진짜 재밌네요. 천식기가 있어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안 되지만 푸르트벵글러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공연을 빼먹을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요. 그래서 나중에 음반을 구입해 들으며 지인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했을지도...원래 실황 녹음에는 노이즈가 들어가게 마련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들으니 왠지 흐뭇하군요^^

마감, 힘냅시다! 제가 쓰러지더라도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가 주세...(콜록콜록)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17 22:56
미로님/ 아잉 뭘요, 부끄러워요^///^ 철학사에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지만 이때의 그리스처럼 드라마틱한 시대는 없는 것 같아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적극 구애하는 미청년 알키비아데스라든가 서로 그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하는 제자들을 보면 최근의 웬만한 여성향 동인지보다 노골적이다 싶기도 하고요. (제가 워낙 불순해서...;)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17 22:56
서녕이/ '서영'이라길래 첨엔 누군가 했다^^; 미안미안, 요즘은 외부랑 완전히 연락을 두절하고 살고 있어서...싸이 구경 잘 했다. 우리 선영인 점점 예뻐지는구나. 자주 놀러갈게~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17 22:57
Starless님/ 도착했습니까.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그 이상의 기쁨이 없죠. 감상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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