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도시
(2년 전 홈페이지의 대문으로 써먹었던 글입니다^^;)

폴 오스터의 디스토피아 소설 <폐허의 도시>에서, 주인공 안나 블룸은 그녀를 사랑해온 소꿉친구에게 자신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을 알리고자 편지를 씁니다.

          "내가 지금 바라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당신의 옛 친구 안나 블룸이다.
           우리가 가려는 곳에 도착하면 그때 당신에게 다시 편지를 쓰도록 하겠다.
           꼭 다시 쓸 것이다."


그 뒤 소설의 결말은 열린 채 미완으로 남습니다. 안나가 과연 오빠인 윌리엄을 찾았는지, 그 지옥과도 같은 도시에서 탈출할 수 있었는지, 과연 살아남기는 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편지의 수취인인 안나의 친구는 미지의 인물이며, 그가 과연 이 편지를 받았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합니다. 독자는 그가 언젠가 안나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게 되길 바랄 뿐이죠.

그런데...

얼마 전 오스터의 다른 소설인 <달의 궁전>을 다시 읽다가, 충격적인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주인공 포그에게는 짐머라는 친구가 있죠. 그는 어려운 처지의 포그를 열성으로 도와 재기하도록 하는 좋은 친구입니다. 짐머는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포그는 그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는 지난 2, 3년 동안 줄곧 안나 블룸인가 블륨인가 하는 여자에게 빠져 있었다. 그녀는 뉴저지 교외에 있는 짐머의 집과 마주 보는 집에서 자라났고, 그의 두 살 아래 누이와 같은 학년이었다. ...그 해 초여름에 그녀는 느닷없이 외국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자기 오빠 윌리엄에게로 떠났고, 그 뒤로 짐머는 그녀에게서 소식 한 자 듣지 못했다. 편지도 엽서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우편함을 확인해 보는 똑같은 의식으로 시작되었고,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그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텅 빈 우편함을 열었다 닫곤 했다. ...우리 두 사람이 길 모퉁이에 있는 화이트 호스 주점에서 맥주에 얼근히 취해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내 친구가 호주머니를 뒤져 우편함 열쇠를 꺼내 들고 거기에 있지 않은 어떤 것, 거기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을 찾아보려고 맹목적으로 손을 뻗치곤 하는 마음 아픈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렇습니다, 안나가 그토록 애절하게 부르던 '당신'은 포그의 친구인 짐머였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달의 궁전>을 통해 가슴 아픈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나의 편지는 결국 짐머에게 도달하지 못했던 거죠. 짐머는 까닭도 모른 채 안나의 무심함을 원망했을 테고, 우리는 끝까지 그녀의 운명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포그가 짐머와 재회했을 때, 그는 평범한 여자와 결혼해 평범한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안나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거예요.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저는 일단 오스터가 그렇게 못박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슴 아픈 일이에요. <폐허의 도시>를 보면서, 저는 어떻게든 그 '친구'가 안나의 치열한 운명에 대해 알아줬으면 했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녀가 원한 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짐머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삶을 지켜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당신은 분명 내 글을 읽고 놀랄 것이다. 그러다가 온갖 걱정과 근심에 빠져 나와 똑같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제발 그렇게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제발. 나는 당신을 잘 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안다. 당신에게 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아직 남아 있다면 제발 내가 빠진 함정에 당신도 빠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당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당신이 이곳 거리를 헤매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는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만 길을 잃은 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당신은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 있으면서 계속 내 마음속에 나를 위한 당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면 된다.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by 루리루리 | 2004/06/08 22:47 |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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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리노 at 2004/06/09 00:05
GO 소설을 읽고 있는데 스기하라가 '내 진짜 성은 이. 이소령의 이.............' 라고 하더라.-- 이거 오타인지 번역 미스인지.. 브루스 리가 어째서.--
Commented by 시안 at 2004/06/09 14:08
아아. 저도 달의 궁전 읽고 안나의 편지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에 쇼크... 안나가 돌아와서 그 친구와 잘 되길 바랬지만서도. 음... 짐머의 평범한 결혼의 상대가 안나일리는 없었겠죠. (폴씨... 그렇게 좋은 사람일리가...(먼 눈)) ㅠ0ㅠ
Commented by Starless at 2004/06/09 20:12
http://web.archive.org/collections/web.html
옛날부터 알던 곳이긴 한데 최근에 다시 이슈가 되더군요. 옛날 글들을 다시 올려주시니 생각나서 적어둡니다. 루리님 홈의 잔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먼산)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9 23:21
리노군/ 오타겠지^^; 아무리 김난주라도 그런 데서 미스를 낼라구. GO 재밌어? 가네시로 카즈키, 읽는다 읽는다 벼르면서도 다른 책들에 찡겨 여태 손도 못 댔네.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9 23:25
시안님/ 그렇지요. 사악대왕 오스터가 그렇게 예쁜 짓을 해줄 리가...따끈따끈하던 짐머랑 포그의 우정도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나잖아요. 그 맛에 좋아하는 작가지만 가끔씩 원망스럽기도 해요^^;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9 23:29
Starless님/ 우와 엑스와이넷에 서식하던 시절의 대문들도 있군요; 본체는 사라졌는데 흔적은 남아 있다니 그것 참 묘한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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