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즈키 리쓰의 <OL진화론>을 보면, 주인공들이 서점 한 켠을 통째로 차지한 미스터리 코너 앞에서 "백화점에 슈피터가 있는 것처럼 서점에도 책 추천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가스케...'역시 그런 발상에서 출발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가스케와 여자친구 미유키는 어느 날 큰맘먹고 격식 있는 독서 레스토랑에 갑니다. 도쿄에서 1, 2위를 다툰다는 고급 레스토랑 '브라운'은 취향에 맞추어 책을 권해주는 독서 도우미를 두고 있어, 손님들은 도우미가 추천한 책을 받아 읽기만 하면 됩니다. 대충 어떤 식이냐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산의 콩닥콩닥거리는 괴기적인 탐정소설을 좋아하시면 정평 있는 것 중에서 요코미조 세이시는 어떠신지요. <악마의 공놀이 노래>, 1959년 작품인데 작가의 숙련된 기교가 아주 일품으로 만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독서 도우미'가 그렇게 추천하자 젊은 여성 손님은 메뉴를 보며 열심히 확인을 한다. "초판이겠군요. 그럼 가격도 비싸지 않아요?" "네. 그 나름대로의 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저 직장인이라." "그렇다면 가도가와 문고판은 어떠실지요. 빈티지는 1980년에 25쇄가 되어 있습니다. 이 25쇄는 잉크의 농도도 각별할 뿐더러 활자도 꽤 닳아 있어서 약간 고풍스런 맛이 있습니다. 가격은 단행본의 십분의 일. 따라서 읽고 난 후 오싹함을 느낄 수 있는 것에 비해 꽤 싼 편이죠." "그래요? 그럼 그것으로 부탁해요." 직장에 다닌다는 두 여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약간 앙금이 있는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앙금요?" "네. 마지막까지 읽게 되면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는데, 그런데도 긴다이치 고스케가 '나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개중에는 그 무책임한 발언에 화를 내시는 손님도 계시기 때문에." "아, 괜찮아요. 그건 긴다이치 고스케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잖아요. 우리 TV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 이토록 자상한 도우미의 인도를 받아 즐거운 독서를 즐기고 있던 가스케와 미유키. 그때 오만방자하기로 악명이 높은 미스터리 평론가 고토쿠 간노스케가 여자들을 데리고 떠들썩하니 가게 안으로 들이닥칩니다. 그의 안하무인한 태도에 눈쌀을 찌푸리는 미유키 앞에서 가스케는 보란 듯이 고토쿠에게 시비를 겁니다. 결국 싸움이 붙은 두 사람 앞에 독서 도우미가 나타나, 언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제안하고, 가스케와 고토쿠는 마니아의 명예를 걸고서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도우미가 어느 소설의 일부를 발췌해 들고 오면, 두 사람이 그것을 보고 책의 서지를 해부하는 것이 대결의 내용으로, 이 부분부터 갑자기 <맛의 달인> 풍의 열기를 띠게 되는데 이게 굉장히 웃깁니다. 다시 인용해 보자면... "문장 안에 있는 대로 주인공의 이름이 '미카라이'. 단 억지로 자네는 이름의 표기가 '기요시'(淸志)인지 '기요시'(潔)인지 알지 못할 부분을 택해 왔다. 주인공의 이름으로 말하자면 틀림없이 이 작품은 시마다 쇼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이야. 따라서 이 문제는 빈티지 즉 발표 연도와 책의 판형에 있다." "역시." '독서 도우미'도 이 대결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팔짱을 낀 고토쿠는 오만한 얼굴을 하고 가스케를 슬쩍 보았다. "보통이라면 언뜻 보아 이 예문은 신서판이나 문고판의 문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맨 처음 나온 단행본 <점성술 살인사건>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알고 있는 대로 이 작품은 처음에는 4*6판인 소프트 커버로 나와 그후 신서판이 되었을 때에 철저하게 개정되었다. 주인공과 기술자 역인 이시오카가 현재의 형태로 바뀐 것도 그때이니까." "그럼 이 문장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1981년 고단샤 소프트 커버판이라는 거군요." "아니, 그게 아냐."하고 고토쿠는 '독서 도우미'의 말을 가로막았다. "후후후, 여기에 있는 어린애 같은 풋내기라면 자네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렇게 답하겠지. 그것의 216쪽 하단의 문장일 거라고. 하지만 나처럼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사람은 쉽게 넘어가지 않아. 이것은 소프트 커버 판 단행본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일 경우에는 '두뇌'의 부분이 '頭腦'라고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같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이라도 개정된 이후의 것이다. 그럼 이것이 개정 후의 어느 책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싹 잘라 지적해 주지. 그것은 책의 귀퉁이를 잘라온 견본을 보면 알 수 있지. 확실히 단행본의 것은 아냐. 따라서 정답은 1987년의 고단샤 문고판이다. 페이지까지 말해주지. 358페이지부터 359페이지, 제 18장의 끝부분이다!" 고토쿠의 말이 끝나자 주위의 관중은 경악과 감동에 휩싸였다. "오오! 세상에!" "어떻게? 굉장해!" "저것만으로 어떻게! 저기까지 알 수 있다니?" "신의 경지다. 천재야!" 어떻습니까, 재미있죠? 그러나 우리의 가스케 군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패배한 듯 보이던 그는 금세 승자의 여유를 머금고 매서운 반격에 들어가는데... "(...) 정확히 이것은 고단샤가 아닌 '고분샤 문고판'으로 1990년 초판입니다.(...) 어떻게 1990년 고분샤 판이란 것을 알았느냐? 증거는 명백합니다. 먼저 문장이 다르죠. 최후의 '그저 네 두뇌가 나보다 떨어진다는 것은 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부분, 그곳이 실은 1987년 고분샤 문고판에서는 '그저 네 두뇌가 나보다 떨어진다는 것은, 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도중에 쉼표가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거, 거짓말이야!" 새파랗게 질린 고토쿠가 소리쳤다. "거짓이 아닙니다. 믿을 수 없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쉼표가 들어가 있는 것은 1990년 고분샤 문고판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다른 증거?" "네. 그것은 종이의 질을 보기 위해 준비된 이 견본입니다. 만져 보십시오. 분명 고단샤 문고가 사용하고 있는 종이와는 다릅니다. 고단샤 문고는 일본 제지의 고단샤 문고용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종이의 윤전기용 무게는 34.5킬로입니다. 그러나 고분샤 문고는 일본 제지의 고분샤 문고용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의 윤전기용 무게는 딱 35킬로입니다. 즉 약간 무거운 것이죠. 게다가 고분샤 문고의 종이가 보기에도 광택이 있으며 감촉도 매끈매끈합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책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줄 모르는 오만한 비평가 고토쿠를 누르고 아마추어인 가스케 군이 승리. 그러나 막판에는 뜻밖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결말이 궁금하신 분은 전문을 한번 읽어 보세요=) 태동출판사의 <베스트 미스터리 2000>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아직 구할 수 있는 책이고 다른 재미난 단편들도 많으니까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놓치지 마시길. 짧게 인용한다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갖다 붙이는 바람에 상당 부분 내용 누설을 해 버린 셈이지만, 대신에 좋은 책을 한 권 소개해 드린 셈이니 그걸로 용서해 주세요^^; |
카테고리
이글루 파인더
최근 등록된 덧글
오랜만에 덧글 남깁니다...
by 당근 at 08/19 노르웨이의 숲 영화는 잘 .. by 나르실 at 08/04 한길세계문학 시리즈 목차.. by EREBUS at 07/11 주신 슌킨쇼는 정말 좋았.. by 치이나 at 07/04 아아 하긴...크게 흥행은.. by 루리루리 at 07/04 영화가 개봉해서 그런 거 .. by 치이나 at 07/04 Starless님/ 네...게임.. by 루리루리 at 07/04 코즈믹 환타지! 와와와~ by 나르실 at 06/28 저 시기에 나온 SF모험.. by Starless at 06/28 시절이 하수상하여 (실은 .. by 나르실 at 06/05 최근 등록된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