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케의 세기의 대결
오늘 포와로님의 이글루를 돌아보면서 즐거워하던 중, 문득 니카이도 레이토의 단편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이 떠올랐습니다. '독서 레스토랑'이라는 독특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마니아 사이의 대결을 그린 이 소설은, 본인도 광적인 마니아임이 분명한 작가 양반이 만화적인 과장을 섞어 유쾌하게 자기 패러디를 연출한 작품입니다. 재미도 있거니와 보고 있으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추리문학계의 깊이에 부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웬만한 소설들은 19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수십 쇄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출간되고 있다니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하기야 제가 일본에 갔을 때에도 추리소설 몇 권 사갈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서점에 들렀다가, 완전히 기가 질려 제대로 훑어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으니까요^^;

아카즈키 리쓰의 <OL진화론>을 보면, 주인공들이 서점 한 켠을 통째로 차지한 미스터리 코너 앞에서 "백화점에 슈피터가 있는 것처럼 서점에도 책 추천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가스케...'역시 그런 발상에서 출발한 소설입니다. 주인공 가스케와 여자친구 미유키는 어느 날 큰맘먹고 격식 있는 독서 레스토랑에 갑니다. 도쿄에서 1, 2위를 다툰다는 고급 레스토랑 '브라운'은 취향에 맞추어 책을 권해주는 독서 도우미를 두고 있어, 손님들은 도우미가 추천한 책을 받아 읽기만 하면 됩니다. 대충 어떤 식이냐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산의 콩닥콩닥거리는 괴기적인 탐정소설을 좋아하시면 정평 있는 것 중에서 요코미조 세이시는 어떠신지요. <악마의 공놀이 노래>, 1959년 작품인데 작가의 숙련된 기교가 아주 일품으로 만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독서 도우미'가 그렇게 추천하자 젊은 여성 손님은 메뉴를 보며 열심히 확인을 한다.

"초판이겠군요. 그럼 가격도 비싸지 않아요?"

"네. 그 나름대로의 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저 직장인이라."

"그렇다면 가도가와 문고판은 어떠실지요. 빈티지는 1980년에 25쇄가 되어 있습니다. 이 25쇄는 잉크의 농도도 각별할 뿐더러 활자도 꽤 닳아 있어서 약간 고풍스런 맛이 있습니다. 가격은 단행본의 십분의 일. 따라서 읽고 난 후 오싹함을 느낄 수 있는 것에 비해 꽤 싼 편이죠."

"그래요? 그럼 그것으로 부탁해요."

직장에 다닌다는 두 여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약간 앙금이 있는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앙금요?"

"네. 마지막까지 읽게 되면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는데, 그런데도 긴다이치 고스케가 '나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개중에는 그 무책임한 발언에 화를 내시는 손님도 계시기 때문에."

"아, 괜찮아요. 그건 긴다이치 고스케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잖아요. 우리 TV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



이토록 자상한 도우미의 인도를 받아 즐거운 독서를 즐기고 있던 가스케와 미유키. 그때 오만방자하기로 악명이 높은 미스터리 평론가 고토쿠 간노스케가 여자들을 데리고 떠들썩하니 가게 안으로 들이닥칩니다. 그의 안하무인한 태도에 눈쌀을 찌푸리는 미유키 앞에서 가스케는 보란 듯이 고토쿠에게 시비를 겁니다. 결국 싸움이 붙은 두 사람 앞에 독서 도우미가 나타나, 언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제안하고, 가스케와 고토쿠는 마니아의 명예를 걸고서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도우미가 어느 소설의 일부를 발췌해 들고 오면, 두 사람이 그것을 보고 책의 서지를 해부하는 것이 대결의 내용으로, 이 부분부터 갑자기 <맛의 달인> 풍의 열기를 띠게 되는데 이게 굉장히 웃깁니다. 다시 인용해 보자면...


"문장 안에 있는 대로 주인공의 이름이 '미카라이'. 단 억지로 자네는 이름의 표기가 '기요시'(淸志)인지 '기요시'(潔)인지 알지 못할 부분을 택해 왔다. 주인공의 이름으로 말하자면 틀림없이 이 작품은 시마다 쇼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이야. 따라서 이 문제는 빈티지 즉 발표 연도와 책의 판형에 있다."

"역시."

'독서 도우미'도 이 대결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팔짱을 낀 고토쿠는 오만한 얼굴을 하고 가스케를 슬쩍 보았다.

"보통이라면 언뜻 보아 이 예문은 신서판이나 문고판의 문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맨 처음 나온 단행본 <점성술 살인사건>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알고 있는 대로 이 작품은 처음에는 4*6판인 소프트 커버로 나와 그후 신서판이 되었을 때에 철저하게 개정되었다. 주인공과 기술자 역인 이시오카가 현재의 형태로 바뀐 것도 그때이니까."

"그럼 이 문장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1981년 고단샤 소프트 커버판이라는 거군요."

"아니, 그게 아냐."하고 고토쿠는 '독서 도우미'의 말을 가로막았다.

"후후후, 여기에 있는 어린애 같은 풋내기라면 자네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렇게 답하겠지. 그것의 216쪽 하단의 문장일 거라고. 하지만 나처럼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사람은 쉽게 넘어가지 않아. 이것은 소프트 커버 판 단행본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일 경우에는 '두뇌'의 부분이 '頭腦'라고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같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이라도 개정된 이후의 것이다. 그럼 이것이 개정 후의 어느 책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싹 잘라 지적해 주지. 그것은 책의 귀퉁이를 잘라온 견본을 보면 알 수 있지. 확실히 단행본의 것은 아냐. 따라서 정답은 1987년의 고단샤 문고판이다. 페이지까지 말해주지. 358페이지부터 359페이지, 제 18장의 끝부분이다!"

고토쿠의 말이 끝나자 주위의 관중은 경악과 감동에 휩싸였다.

"오오! 세상에!"

"어떻게? 굉장해!"

"저것만으로 어떻게! 저기까지 알 수 있다니?"

"신의 경지다. 천재야!"



어떻습니까, 재미있죠? 그러나 우리의 가스케 군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패배한 듯 보이던 그는 금세 승자의 여유를 머금고 매서운 반격에 들어가는데...


"(...) 정확히 이것은 고단샤가 아닌 '고분샤 문고판'으로 1990년 초판입니다.(...) 어떻게 1990년 고분샤 판이란 것을 알았느냐? 증거는 명백합니다. 먼저 문장이 다르죠. 최후의 '그저 네 두뇌가 나보다 떨어진다는 것은 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부분, 그곳이 실은 1987년 고분샤 문고판에서는 '그저 네 두뇌가 나보다 떨어진다는 것은, 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도중에 쉼표가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거, 거짓말이야!"

새파랗게 질린 고토쿠가 소리쳤다.

"거짓이 아닙니다. 믿을 수 없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쉼표가 들어가 있는 것은 1990년 고분샤 문고판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다른 증거?"

"네. 그것은 종이의 질을 보기 위해 준비된 이 견본입니다. 만져 보십시오. 분명 고단샤 문고가 사용하고 있는 종이와는 다릅니다. 고단샤 문고는 일본 제지의 고단샤 문고용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종이의 윤전기용 무게는 34.5킬로입니다. 그러나 고분샤 문고는 일본 제지의 고분샤 문고용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의 윤전기용 무게는 딱 35킬로입니다. 즉 약간 무거운 것이죠. 게다가 고분샤 문고의 종이가 보기에도 광택이 있으며 감촉도 매끈매끈합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책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줄 모르는 오만한 비평가 고토쿠를 누르고 아마추어인 가스케 군이 승리. 그러나 막판에는 뜻밖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결말이 궁금하신 분은 전문을 한번 읽어 보세요=) 태동출판사의 <베스트 미스터리 2000>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아직 구할 수 있는 책이고 다른 재미난 단편들도 많으니까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놓치지 마시길. 짧게 인용한다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갖다 붙이는 바람에 상당 부분 내용 누설을 해 버린 셈이지만, 대신에 좋은 책을 한 권 소개해 드린 셈이니 그걸로 용서해 주세요^^;
by 루리루리 | 2004/06/07 17:37 | | 트랙백(1) | 덧글(10)
트랙백 주소 : http://azalea822.egloos.com/tb/55868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무례한코코아]얼음집 at 2004/06/08 21:21

제목 : 또 책을 질렀다orz
1. 김선자의 중국신화 이야기 - 우주거인 반고에서 전쟁영웅 치우까지 김선자 지음 / 아카넷 2.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1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태동출판사 1권 3.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2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태동출판사 1권 4. 사랑해야 하는 딸들 - 단편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시공코믹스 1권 5. 세치 혀가 백만 군사보다 강하다 리이위 지음, 장연 옮김 / 김영사 1권 6. 칼바니아 이야기 8 토노 지음 / 서울문화사 --- --- ---......more

Commented by 미로 at 2004/06/07 21:22
책의 달인 ㅠ ㅠ)d
Commented by Starless at 2004/06/08 00:34
너무너무 유쾌해서 박장대소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맛의 달인식 패턴으로 가자면 이쯤해서 명인이 뭔가 마지막 히든카드로 판세를 뒤엎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 말입니다..
Commented by 펜릴 at 2004/06/08 01:16
으하하하하하학;ㅁ; 어떻게 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마니아 대결이라던가 전문가 대결 같은거라면 홀딱 넘어가곤 하는데, 소개글을 보고 있으려니 더욱 더 감동.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D
Commented by 당근 at 2004/06/08 13:11
우하하 진짜 재미있어요. 실제로 이런 레스토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번에 단골에 적립카드로 마구마구 긁어서 사은품으로 무슨무슨 책 한정본을 얻어버릴텐데.
Commented by 사이암 at 2004/06/08 15:09
가히 최고! 며칠 전 서점에서 지나다 발견했던 기억이 있는 듯한데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ㅠ_ㅠ 아, 그리고 책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사랑해요! ;ㅁ; (덥석)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8 22:15
미로님/ 멋지죠>_<)d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8 22:32
Starless님/ 사실 막판 뒤집기가 있긴 있는데, 알면 좀 실망스러워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유쾌상쾌통쾌해서 그걸로 족하지만. 근데 작중에서 문장을 포도주 음미하듯이 감상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이 작가 진짜 <맛의 달인>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은 부분이 꽤 있어요. 만화팬들이라면 두 배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죠.

그나저나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은 읽은 적이 없어 잘 몰랐는데, 저 긴다이치 집안, 할아버지나 손자나 피를 부르기로는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로군요^^;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8 22:33
펜릴님/ 사실 용호상박과도 같은 두 마니아의 싸움에는 스포츠 신문의 극화에서 써먹을 법한 트릭이 숨겨져 있었으니...-_-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직접 보시면 실망하실지도. 그래도 얘기 자체가 재미있고, 애호가 입장에서는 말만 들어도 두근두근한 작가들의 이름이 쉴새없이 열거되니까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답니다=D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8 22:36
당근님/ 그쵸그쵸! 저도 저런 레스토랑이 있으면 좋겠어요. 좀 비싸더라도 알뜰살뜰 돈 모아서 틈만 나면 가서 앉아 열권 스무권씩 읽어제낄 텐데. 거기다 소설속 묘사를 보면 조명이라든지 테이블, 의자의 배치까지 전적으로 독서가들을 고려했다고 하니 로망이 아닐 수 없지요>_< 진짜 어디 저런 레스토랑, 아니 굳이 식당이 아니더라도 카페 같은 곳이라도 안 생길까나요.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6/08 22:41
샴언니/ 예전 나왔던 미스터리 단편집들은 족족 절판되는 추세이지만, 이 책은 아직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서두르세요>_< 참, <베스트 미스터리 2000>이라는 애매한 제목을 달고 있는데 사실은 전부 일본 추리소설들이에요. 영미권 소설들과는 다른 독특한 맛이 매력 포인트.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꾸물대다 늦게 보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책을 언니가 읽어주신다니 생각만으로도 기뻐요^^

:         :

:

비공개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