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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야마다 에이미의 <풍장의 교실>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원고를 하다 보니 어느새 열 시가 되어 버렸군요. 결국 예전 홈페이지에 올렸던 북토크 세 개를 백업하는 셈치고 재탕합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흑흑;
아래는 2003년 10월에 올린 동서 미스터리 북스 중 다섯 권에 대한 단상. 앙리 프레데릭 블랑의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과 페터 회의 <여자와 원숭이>의 리뷰도 함께 올라갑니다. **** 루리루리가 10월 한 달 동안 읽은 것이라고는 추리소설밖에 없다는 것은 일기장을 들여다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뭐 그리 창피한 일은 아니지만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라서, 케헴. 추리소설의 존재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으니 생각하는 것이 늘상 그 수준에서 맴돌지 않겠습니까...옛날에 비해 전혀 달라진 게 없잖아 라고 반박하신다면 역시 할 말이 없지만.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의 업데이트 기념으로(기념?) '추리소설 대특집'을 꾸며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손을 대려니까 이게 또 귀찮아요. 과제로 작성한 A4 여섯 장 분량의 글을 그냥 올려버릴까 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횡설수설이라 탐탁하지가 않고. 한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결국 그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하는 선에서 멈추기로 했습니다. 내용이 짤막짤막한 것은 어디까지나 앞으로 이 책들을 읽으실 분들에게 여지를 남겨드리고 싶어서...라고 우기고 싶지만, 결국은 그냥 귀찮은 것뿐이죠. 아아 그런데 또 왜 이리 횡설수설이람. 일단 첫타. 존 딕슨 카의 <화형법정>. ![]() 재미있겠죠?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뭔가 어두침침하고 피냄새 나는 스토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틀림없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세기 현재의 살인 사건 뒤에 15세기의 전설적인 여자 살인마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본명은 마리 도브리)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거기에 17세기의 마리 도브리, 현재의 마리 도브리까지 뒤얽혀 이야기는 섬뜩한 호러물의 형상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카의 소설답게 일견 불가능한 듯한 트릭이 해명되고, 의혹이 하나하나 풀리면서 반전에 반전...그리고 마지막의 대반전. 추리물의 요소와 괴기물의 요소가 고루 잘 버무려진, 상당히 고급스러운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잘 쓰여진 추리소설이 그렇듯 몰입도가 상당해요. <로즈메리의 아기>와 비교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사실 본격 오컬트물로 보기엔 너무 약하고,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도 약하고...퓨전 덮밥의 맛이란 원래 이런 거야 라고 음미하면서 즐기면 딱 좋은 작품입니다. 두번째, 레니 에이드의 <아기는 프로페셔널>. ![]() O. 헨리의 '붉은 추장의 몸값'과 존 러츠의 '썩은 감자'를 장편으로 길게 잡아 늘린 듯한 소설입니다. 주인공인 해리 블래이튼은 오랜 악연으로 맺어진 옛 동료 몰랜드에게 덜미를 잡혀, 원하지 않는 유괴 계획에 가담하게 됩니다. 몰랜드와 해리 외에도 매혹적인 여인 폴라, 거구의 사나이 하먼이 이 일에 동참하는데, 그들은 주 200달러의 임대료로 빌린 아이를 부호의 아들과 바꿔치기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니, 바로 빌린 아이(이른바 프로페셔널 베이비)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인 반면, 유괴해온 부호의 아들은 세상에 이런 망나니가 있나 싶을 정도로 늘상 빽빽 울어대며 사람을 괴롭히는 골칫덩어리인 것입니다... 그 뒤의 전개는 뻔하죠? 앞에서 예를 든 두 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악당들은 유괴해온 아이에게 학을 떼게 되지만, 개망나니 자식이 없어져서 마음이 편해진 부호는 좀처럼 몸값 협상에 응하려고 하지 않고, 그 바람에 상황은 점점 악당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갑니다. 결말까지가 다분히 눈에 보이는 작품으로, 전체적인 터치도 줄곧 코믹하고 가볍게 일관되고 있습니다. 딱 기대한 만큼만 보여주고 기대했던 선에서 끝내기 때문에 읽고 나서 포만감을 느낀다거나 그런 소설은 아녜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실망하실 겁니다. 하지만 뭐, 문장도 분위기도 무척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쿡쿡 웃으면서 보기에는 딱 좋아서, 하드한 소설들로 머리가 무거울 때 기분 전환용으로 읽기에는 적당한 작품입니다. 세번째, 패트리샤 모이스의 <죽은 사람은 스키를 타지 않는다>. ![]() 스코틀랜드 야드의 헨리 티베트 경감은 평상시에는 사람 좋은 애처가이지만, 사건이 터지면 '나의 코'라고 부르는 직감을 따라 절묘한 추리를 펼쳐보이는 명탐정으로 변신합니다. 어느 날 그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마약 밀수단의 꼬리를 잡기 위해 아내와 함께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산중의 호텔에 숙박하게 됩니다. 이 호텔에는 여러 가지 사연과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기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고, 마침내 최초의 희생자가 나타났을 때 폭발한 갈등의 파편들이 한 조각 한 조각씩 사건의 실마리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차츰 완성도가 그려질 무렵, 갑자기 두번째 살인이...! 영국의 작가인 패트리샤 모이스가 처음 등단했을 때, 여기저기에서 그녀를 일컬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후계자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그녀의 데뷔작인 이 <죽은 사람은 스키를 타지 않는다>는 크리스티풍의 정석과도 같은 구성의 작품입니다. 읽고 있노라면 여러 부분에서 기시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해요. 그만큼 기본에 충실하고 섬세해서 편안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지만, 바꿔 말하자면 지나치게 '안전'하달까...그리 화려한 기교도 없고 수수한 느낌이에요. 탐정이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취조해서 얻어낸 단서들을 지그소 퍼즐 맞추듯 완성된 그림으로 맞추어나가는 본격 추리물의 과정 그 자체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어필할 만한 작품입니다. 그 대신 기발한 트릭이나 별난 탐정들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좀 심심할 수도 있겠지요. 정석에 충실한 만큼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는 꽤 높은 편입니다. 네번째, 피터 러브제이의 <가짜 경감 듀>. ![]() 월터 바라노프는 앞날이 보이지 않는 독순술사였던 그를 유망한 치과 의사로 만들어준 아내의 손아귀에 꽉 쥐여 사는 공처가입니다. 그런 그를 그의 환자이자 꽃집 아가씨인 알머가 남몰래 사모하게 되는데, 알머는 늘상 로맨스 소설만 읽고 자기가 소설의 주인공이 된 양 공상을 하는 낙으로 살아가는 처녀입니다. 그녀는 엄처시하에서 고분고분 살아가는 월터를 설득하여 리디아를 살해하고 그녀의 재산을 둘이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마침내 리디아가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모리나티아 호라는 호화 여객선에 탑승하던 날, 월터와 알머는 리디아 몰래 그 배에 동승하고, 그녀를 죽여 바다에 내던지는 것으로 두 사람의 계획은 성공한 듯했으나, 공교롭게도 여자의 시체가 인양됨으로써 두 사람은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월터는 배에 탈 때 전설적인 명탐정 듀 경감의 이름을 빌어 사용했는데, 그를 진짜 듀 경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이 사건의 조사를 의뢰해온 거죠. 이제 월터는 남모를 중압감을 어깨에 지고 불안한 연극까지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배가 미국에 닿기까지는 불과 일주일. 앞으로 월터와 알머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 흘러갈까요? 이 소설은 동서 미스터리 북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에 속하고, 그만큼 많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통통 튀는 공처럼 도대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스토리가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에요. 인터넷 독자서평 쪽에서도 어디서나 "속았다!"라는 즐거운 외침이 들려오더군요(웃음). '마누라 죽이기'라는 흔한 소재 아래 겹겹이 복선을 깔아놓고, 교묘하게 상황을 비틀면서 전개해 나가는 작가의 필력이 아주 맛깔스러워요. 물론 정작 심장부인 추리 과정이 얼마간 슬겅슬겅, 대충대충 그려진 느낌이어서 그 점에서는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짜여 있는 행간 사이사이에서 작가의 짓궂은 표정들을 하나하나 캐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답니다. 지나치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팽팽한 재미가 있는 소설을 원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세요. 다만 초반부에 주의하시길. 많은 단서가 처음 몇 페이지 안에 숨어 있거든요=) 다섯번째, 조이스 포터의 <도버4/절단>. ![]() 조이스 포터의 주인공 도버 경감은 탐정 사상 최악의 캐릭터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어디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 공식적인 묘사를 한번 들여다 볼까요. '그의 생김새를 살펴보면 키 6피트 2인치(약 188센티미터)에 몸무게는 110킬로그램, 배 언저리에 살이 디룩디룩 찐 거한인 그는 마치 추남을 그려놓은 듯하다. 투실투실한 이중턱인 얼굴에 단추 구멍 같은 눈과 경단 같은 코와 지저분한 입이 자리잡고 있으며, 코 아래에는 아돌프 히틀러 이래로 완전히 인기가 없어져 버린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경찰관답게 감색 사지 제복을 입고, 두툼한 돼지 목에 푸른 색 칼라를 달고 있지만 지방질에 파묻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이중턱 아래로 늘어져 있는 싸구려 넥타이. 그 위에 헐렁한 짙은 감색 외투를 입고 딱딱한 검은 장화를 신었는데, 어깨에는 언제나 비듬이 잔뜩 떨어져 있어서 비가 오면 밀가루처럼 반죽이 될 정도이다...성격은 음험하고 비열하고 천박하며 무신경하고 고집 세고 질투가 많은 데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심술궂다. 게다가 무지무지하게 화를 잘 낸다.' 뭐, 원래 셜록 홈즈에서 고양이 프란시스에 이르기까지 고금동서의 탐정이라는 족속들이 과히 정상인(혹은 정상猫)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그래도 그렇지, "어이 작가 아줌마, 아무리 그래도 당신 주인공인데 이렇게 추접스러워도 되는 거야?"라고 묻고 싶어진달까, 참 이렇게 밥맛 없는 아저씨를 잘도 주인공으로 설정했구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고 있으면 정이 가니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죠. 어디까지나 도버 자신의 캐릭터성보다는 작가의 경쾌발랄한 필력에 힘입은 바라고 생각하지만, 여하간에... 이렇게 모든 탐정들의 악덕만을 한 몸에 모은 주인공 윌프레드 도버는 런던 경시청의 어엿한 주임 경감으로, 휴가를 즐기기 위해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한 남자의 자살을 목격하게 된 뒤 얼토당토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평범한 농촌인 월라튼 마을에서는 얼마 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거친 남자들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꼭 일주일 뒤에 양처럼 순해져서 다시 나타나는 겁니다.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물론 이렇게 얌전히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휴가를 잃어버린 도버가 이루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욕설과 푸념으로 저항했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건을 맡게 된 도버는 콧구멍을 슬슬 후비기도 하고 여느 때처럼 모로 드러누워 부하인 매글레거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면서 진상에 조금씩 접근해 가는데, 그 뒤에는 실로 무시무시한(그러나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로서는 실소할 수밖에 없는) 비밀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르릉 쾅쾅. 이 소설은 시작도 과정도 결말도 그저 떠들썩하고 유쾌하고 우당탕탕 시끄럽기만 해서, 아무 부담도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그야말로 고급 오락물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묵직한 맛이 별로 없어서 다 읽고 나도 포만감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음식으로 치자면 오르되브르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이걸로 몸을 풀고 카의 <화형법정>을 읽고 다시 <아기는 프로페셔널>을 읽고...하는 식으로 찬물 더운물을 번갈아 머리에 끼얹었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즐기면서 모처럼 즐거운 '추리소설의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참, 뒷부분에는 라이오넬 화이트의 단편 '어느 사형수의 파일'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결말이 눈에 보이는 내용이긴 하지만 제법 읽을만 합니다. 어쩌면 얼마 전 <20세기 범죄 실화 시리즈>(자유문학사)에서 읽은 제임스 윌슨 사건하고 비슷해서 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도버 경감은 남편 있는 여자가 죽으면 현장에 가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범인은 남편이다. 아내 살해범은 반드시 남편이니까!"라고 외쳐대는데, 사실 이거 추리소설의 세계에서는 꼭 빗나간 얘기도 아녜요. 안 그래요? 요 근래 추리소설을 죽 보고 있노라니 정말 진정한, 무서운, 가장 지독한 숙적은 남편과 아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상으로 동서 미스터리 북스 중의 다섯 권에 대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오랜만에 북토크를 썼더니 손가락이 찌릿찌릿해서(거짓말). 다음에는 <웃는 경관>, <나인 테일러스>, 장 자크 피슈테르의 <표절>, 뒤렌마트의 <법>에 대해 쓰겠습니다...라고는 해도 과연 언제가 될지, 루리루리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하느님도, 부처님도 모르시는 일이죠. 엣헴. 덧 : 이 <20세기 범죄 실화 시리즈>는 얼마 전 헌책방에서 다섯 권 전부를 사서 하룻밤만에 다 읽어 버렸는데, 정말 1권 첫장부터 5권 마지막 장까지 쉴새없이 사람들이 토막토막으로 잘려나가거나 피칠갑된 반죽으로 변해 버려서...아아 현실에 비하면 추리소설의 세계란 얼마나 평화로운가 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탄식을 자아내게끔 만든 물건이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대부분의 사건이 악의 없이 그저 무분별한 충동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에요. 어떤 이야기는 너무 잔혹해서, 이거 혹시 옐로우 저널리즘이 날조해낸 얘기 아냐 하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콜린 윌슨이 출간에 기여하고 추천사까지 썼으니 꼭 그렇게 의심할 일도 아닌 거겠죠. 거 참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이토록 보잘 것 없는 육신을 가지고 이렇게 험난한 세상에서 잘도 살아나가고 있다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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