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자 헌책방 구매기
책을 좋아하고 자주 사 모으는 편이라는 것은 어따 내밀어도 썩 부끄러운 취미는 아닙니다만, 주위 사람들이 종종 지적하듯 제 경우 정도가 지나쳐 망집이 되지나 않았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어제의 일입니다. 두 시간 남짓 자고 일어난 루리루리는 머릿속에서 "오늘은 나가면 안 돼!"라는 천사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왜죠, 천사님? 오늘 헌책방에 책 찾으러 가야 하는데요."라고 묻자 곧바로 "그날이잖아♡"라는 대답이...참고로 루리루리는 생리통을 참으로 지독하게 겪는 편인데, 심할 때는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낸 뒤 집안을 기어다니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단순히 배만 아픈 게 아니라 두통에 요통에 관절통에 현기증에 식욕부진에 고열까지 겹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아주 지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리 휴가를 없애야 된다는 둥 하는 헛소리를 들으면 곧장 눈에서 빔이...)

여하간 천사님의 온화한 충고에 '그러쿠나...무서운 날이 와 버렸꾸나'하고 생각한 루리루리는 벌렁 드러누워 조금 더 자려고 했지만, 그놈의 책! 주문한 책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는 데다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귀한 책들이 어떤 악랄한 사람의 손에 팔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충 상태를 가늠해 보니 머리가 좀 무겁긴 해도 수면부족이라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을 듯했고, 아랫배가 따끔따끔하긴 했지만 위험 수치는 아니었고...오케이. 스스로를 납득시킨 루리루리는 식욕도 없는데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곧장 세수만 하고 왕복 네 시간의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갈 때는 비교적 문제가 없었어요.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외대 앞이더군요. 심호흡을 하고 내리는데 눈앞이 핑 돌면서 그때부터 상태가 이상한 겁니다.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물러날 순 없어! 하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골목을 돌아돌아 비탈길을 올라, 신고서점으로.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쌓여 있는 물건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습니다만, 갖고 간 돈으로는 주문한 책만 사기에도 빠듯했으므로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당장 눈에 띈 것은 전부터 벼르던 척 팔라닉의 <인비저블 몬스터>와 <서바이버>! 얏호 역시 하늘은 착한 사람을 보살피시는 거야 운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덥썩 집어들었습니다. 다음에는 <예고살인>을 비롯한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 다섯 권. 그리고 한번쯤 읽고는 싶었지만 사기는 망설여졌던 에바 헬러의 <복수한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모택동 비록>과 <과학혁명의 구조>가 눈에 밟혔지만 이 두 권은 헌책치고는 약간 비쌌기 때문에 패스. 어제는 예전처럼 인문 사회과학 책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 약간 서운하면서도 안심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번 책쇼핑 때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프로이트 전집을 비롯하여 놓친 게 너무 많아서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돌아왔거든요^^;

고른 책들과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들을 합쳐서 계산하려는데...어라어라, 아줌마, 이거 주문했던 것보다 많은데요? 잘 보니 예전에 주문했다 취소한 것을 그냥 합쳐서 들고 오셨더라구요. 아니 이러심 안 되는데...이거 예산 엄청 초관데...하며 빼달라고 부탁하려다가 막상 눈앞에 두니 또 마음이 약해짐T_T 그래 어차피 죽어도 책에 깔려 죽는 것이 소원 아니었더냐 하고 자포자기하여 그냥 합쳐서 계산해 버렸습니다.


오버했다...

지난번 절판본 탐방 때 쓴 돈도 만만치 않아, 간신히 밥값과 화장품값(그것도 아까워 미샤에서 3,300원짜리로 사려고 했는데) 정도만 남겨둔 참인데, 이걸로 한달간 아이크림과는 또다시 사요나라야 하고 흑흑 울면서 스물여덟 권을 가방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권수로는 지난번과 똑같지만 몸 상태가 상태여서 그런지 걸머지는 순간 허리가 뚝 부러질 것 같두만요; 어머니~이번에는 위험할지도 몰라요 하는 심정으로 어떻게 간신히 전철을 탔습니다. 평일 오전인데 인천행 승객이 왜 그리 많은지, 너무 무거워 짐을 선반에 얹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데...

그러길 한 시간.

기다려도 기다려도 자리는 나지 않고, 빈속에 수면부족이 겹친 데다 슬슬 아랫배가 쑤셔오기 시작하고,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면서 등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나중에는 어지러워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겠기에 결국 온수에서 내리고 말았습니다. 화장실에서 신나게 토한 다음 수돗물 벌컥벌컥 마시고 멍하니 역 안 벤치에 앉아 있다가 기운 차리고 다시 승차.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제물포로. 내려서 그 짐을 짊어지고 다시 십오 분의 도보...

아니 정말, 책쇼핑 도중 요단강 너머에서 손을 흔드시는 할아버지를 뵌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니까요.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꼼짝도 않고 저녁까지 잤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비로소 전리품 정리.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추리소설입니다. 위는 문고판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들. 그 옆은 해문에서 나온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아래는 왼쪽부터 패트리샤 콘웰의 <악의 경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추리소설 단편집인 <잠겨 있는 방>과 <표범은 밤에 사냥한다>, 다시 크리스티의 <예고살인>, 헨리 슬레서 외 추리작가들의 단편집 <러브 미스테리>, 로스 맥도날드의 <움직이는 표적>입니다.

고려원에서 나온 <수의 신비와 마법>, 씨앗판 <호빗>, 에이미 탄의 <조이럭 클럽>,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 프랑수아 모리악의 <떼레즈 데께루, 밤의 종말 외>, 다시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 가스통 루르의 단편집 <공포야화>, 아래 왼쪽부터 <인도철학>, 척 팔라닉의 <서바이버>와 <인비저블 몬스터>, 에바 헬러의 <복수한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 루마니아 작가들의 단편집인 <숲속의 동화>, 밀란 쿤데라의 <사랑>.

이상 스물일곱 권. (또 한 권이 있긴 한데 그건 이벤트용이라 나중에 공개하겠습니다)

덕분에 얻은 피로로 오늘은 꼼짝도 못하고 하루종일 혼수상태에서 앓았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찌나 바보스러운지, 한동안은 있는 책이나 읽으며 자중해야지...라고 다짐해도 자신이 없네요^^; 대개 소설류라 금방금방 읽는 편이어서, 지난번 절판본 탐방 때 사온 책들도 반 이상 읽었고, 오늘 사온 것들까지 다 읽어 버리면 또 언제 가방 짊어지고 떠날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라, 화장품은 다 떨어져 올리브유라도 발라야 할 지경이고, 맛있는 거 먹어본 지도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한때는 있는 돈 다 화장품과 옷에 투자하던 시절도 있었거든요. 그 시절만 해도 피부는 매끌매끌 탱탱, 하관도 멀쑥해서 어디 돌아다녀도 부끄럽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하기야 뭐, 자기다운 게 제일 좋다고 하잖아요^^; 이래저래 불평하고는 있지만 결국 앞으로도 아귀찬 책찾아 삼만리 고행을 마다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체력이 회복되면 & 돈이 생기면 다음에는 강남권 대형서점들을 중심으로 절판본 탐방을 떠나볼까 합니다. 그때 올릴 보고서도 한심한 마음으로 기대해 주세요~
by 루리루리 | 2004/05/28 22:59 |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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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리노 at 2004/05/28 23:24
헌책방에 가면.
죽지말고 돌아와야해.;;
Commented by 지케이오 at 2004/05/29 10:50
이 인간아... 너랑 안 놀아...
Commented by 十五夜 at 2004/05/29 11:21
그러고보니 최근엔 만화책 이외의 책을 사본 기억이 묘연...;;;

아, 법정스님 책 '선물용'으로 샀군요.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도 분류상은 소설책이니...(笑)
Commented at 2004/05/29 12:3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ej at 2004/05/29 15:07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눈물)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육체적인(?) 영양보충을...!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30 01:35
리노군/ 어느날 신문에 "한여름 땡볕에 책 짊어지고 가던 여자, 도로 한복판에서 사망"라는 기사가 실리면 난 줄 알아 줘T_T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30 01:35
지케이오/ 그러지 말고 놀아줘잉♡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30 01:41
十五夜님/ 사실 저도 손가락에 불 붙은 듯 책을 긁어모으기 시작한 건 3년 전부터의 일이고, 그 전에는 돈만 생기면 전부 게임이랑 만화책이랑 캐릭터 굿즈 모으기에 바빴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께서 수집품을 죄다 내버리신 이후, 극심한 충격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버림 받을 염려가 적은 책만 죽자고 모으게 되었지요^^;;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30 01:49
알렙님/ 네 맞아요! 꺄악 가까운 곳에 계셨군요! 혹시 서점 같은 곳에서 우연히라도 알렙님과 스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두근두근하네요. (넓은 듯하면서도 의외로 좁은 동네잖아요~) 이것도 인연인데 언제 한번 차라도...헤헤헤.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30 01:58
ej님/ 히잉 역시 ej님밖에 없어요T_T 하지만 그냥 당근님 ej님 뵙기만 해도 hp가 회복될 것 같아요. 원고 끝나면 저희 집에 한번 놀러오실래요? 너무 멀어서 실례가 되려나...;
Commented by 당근 at 2004/05/30 16:52
사진 속에서만 보던 그 서가를 보는 것 만으로도 거리 따위는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 입니다. 등가교환이라는 것도 있잖습니까. 그치만 하루 세끼는 꼭 드세요. 삼각김밥에 라면이라도 열량 보충은 해야 책을 읽을 때 글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당근은 걸레짝 되기 반보 직전인 일리아드를 새 하드백으로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 중입니다만, 어디에도 하드백 일리아드는 없군요.ㅠ.ㅠ 하드백은 고사하고 페이퍼백도 잘 없더군요. 이럴수가.ㅠ.ㅠ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30 22:44
사실 입으로 떠든 것에 비해서는 변변치 않은 서가입니다만...^^; 그래도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봐 주신다면 무척 기쁘고 보람될 거예요. 두 분 초대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원고 끝내야겠네요. 전처럼 여러 분들이랑 재미나게 놀자구요>ㅅ<

그런데 일리아드가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책이었습니까; <트로이>도 나오고 <헬렌 오브 트로이> 같은 드라마도 방영되었으니 조만간 번쩍번쩍한 하드커버 일리아드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Commented by 당근 at 2004/06/01 13:29
그게요;; 영풍에는 일리아드가 2001년에 들어오고나서 들어온 적이 없어서 재고가 없대요. 서점엔 일반적으로 4900원에 할인판매하는 옥스포드 출판사거가 있긴 한데 그게 인쇄가 대략 똥이라서말입니다;; 글씨가 개미만한데다 어떤 건 잉크가 번져 있어요.

그나마 이번에 세끈하게 좀 크게 해서 나온 펭귄 게 낫긴 한데 이건 또 번역이 마음에 안들어서 말이죠;; 좀 너무 현대화 해서 가볍달까요;; 반디앤 루니스에 다른 출판사 거가 몇 개 있긴 했는데 그것도 다 좁쌀만한 글씨의 포켓북이어서 패스.

예스 24가 홈페이지 다 고치면 거길 한 번 두드려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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