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r - 구원하는 자, 구원받는 자
(이 글은 2년 전 홈페이지 프리토크란에 올렸던 Air 감상문입니다. 그때도 사실 자신 있게 쓴 글은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가일층 어설픈 듯싶어 부끄럽네요. 내용상의 오류점도 많으리라 생각하니 모쪼록 고수분들의 엄정한 편달 부탁드립니다.)

이미 오래 전 여기에 Air에 대해 적은 바 있고, 또 어떤 종류의 게임이든 플레이한지 3일 이내에 리뷰를 쓴다는 것이 제 철칙이라 새삼 오래 전의 게임 얘기를 한다는 것이 껄쩍지근하네요. 하지만 예전에 적었던 글은 솔직히 리뷰라기보다 자기 감정에 도취해서 쓴 잡문이었고, 이토록 마음에 깊게 남은 게임에 대해 그 정도로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언젠가 기필코 제대로 된 리뷰를 쓰겠노라고 벼르고 있었답니다. '도대체 Air가 어떤 게임이냐'라는 지인들의 질문도 있었고요(웃음).

하지만 역시 없는 기억력을 채근해서 반추해본다 해도 되살아나는 게 별로 없군요. 클리어한지 오래 된 게임이니만큼 보다 냉정하게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잃어버리는 것도 많겠죠. 아무튼 해보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용=)

일단 Air라는 게임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테니까 대강만 적겠습니다. 미소녀 게임이고 비주얼 노벨이지요. 제작사는 Key. One의 제작사인 Tactics에서 분가하여, 첫 작품인 Kanon으로 대박을 터뜨린 뒤 Air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현재 Clannad라는 신작 게임의 발표를 앞두고 있는 회사입니다. 마에다 준이나 히사야 나오키와 같은 특출난 인재들의 활약에 힘입어 Leaf 이후의 신생 제작사 중에서 가장 귀추가 주목되는 곳이랍니다.

이 회사에서 내놓는 작품들은 죄다 각본가인 마에다 준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습니다. 때문에 세계관이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늘 전작들과 연결해서 평하게 된다는 특징을 갖죠. 엄밀히 말하면 Key의 게임이라기보다 마에다 준 개인의 작품으로서 더 강하게 어필하는 거예요. One-Kanon-Air는 서로 다른 주인공과 상황 설정을 전제하는 작품들이지만 비슷한 주제를 가진 삼중주이기도 합니다. (카논의 경우 다소 이질성을 갖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합시다) 파괴, 상실, 그리고 재생이라는 성장물의 주제죠. '성장'이란 잘못 손대면 대단히 진부해지지만 잘 꾸미면 엄청난 호소력을 갖는 소재입니다. 마에다 준은 이 점을 잘 알고 이용하는 크리에이터예요.

마에다와 히사야 콤비가 Tactics 시절 만든 작품인 One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오리하라 코우헤이는 겉보기에는 명랑쾌활하고 반죽 좋은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뒤 단 하나의 가족이었던 여동생을 눈앞에서 잃었다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진 것 같았지만 점차 코우헤이의 의식을 잠식해, 마침내 그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사라져가는 코우헤이는 마지막으로 한 소녀를 사랑합니다. 그 상대는 소꿉친구인 나가모리가 되기도 하고 전학생인 루미, 상실감으로 마모된 아카네, 장님인 미사키, 정신지체아 마유, 벙어리인 미오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의 유대는 코우헤이를 치유하는 동시에 그가 선택한 소녀를 치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코우헤이가 귀환하는 결말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성장한 남녀가 되어 마주보게 되는 거죠.

'소멸-상실'이라는 키워드는 차기작 Kanon에서 또다시 변주됩니다. 주인공 유이치는 7년 전 떠났던 도시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7년 전의 기억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유이치는 눈으로 뒤덮인 도시를 돌아다니며 몇 명의 소녀들을 만나게 되고, 각자가 지닌 고통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녀들은 유이치에 의해 구원받고 치유됩니다. 그런데 Kanon의 단점은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가 멈춘다는 점에 있습니다. 유이치의 기억 상실은 매력적인 소재이고, 다른 캐릭터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활용되었다면 정말 좋은 이야기가 될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히로인 아유와 나유키에게서 막혀 버립니다. 게다가 나유키 스토리에서는 그다지 잘 이용되지도 못했어요. 아키코상의 사고로 이야기의 흐름이 흐트러지고 만 거죠. 상실의 열쇠가 되는 아유는 끼어들 자리도 찾지 못했구요. 그 때문에 주인공은 제 목소리를 잃고 오직 히로인들의 아픔을 투영하는 도구로 쓰이고 말았습니다. One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상호성'을 잃어 버리고 만 거예요.

물론 Kanon에도 다양한 '상실'의 형상이 등장합니다. 어머니인 아키코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유키, 자신의 생명을 잃어가는 시오리, 존재 자체를 잃어 버리는 마코토와 아유, 많은 것을 잃어왔고 이제 친구 사유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마이. 이중 시오리와 마이의 시나리오는 각각 카오리와 사유리라는 조연에 힘입어 강한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소멸'이라는 키워드를 계승한 마코토 시나리오는 두말할 나위도 없구요. 아유는...메인 시나리오인 만큼 신파적이기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유키와 마찬가지로 잘 나가다가 턱 막혀 버린 느낌이 듭니다. 아유는 One의 코우헤이가 그랬듯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귀환에는 One과 같은 필연성이 없어요. 아유 시나리오에서 유이치는 잃어 버린 기억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성장하지는 않죠. 아유를 잃음으로 해서 유이치가 성장한 것이 아니냐고요? 글쎄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마코토 시나리오와 비교해보면 이 부분의 처리가 얼마나 미흡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코토 시나리오는 One을 계승하는 동시에 Air의 초석으로 기능합니다. 유이치는 마코토를 상실하고, 아마노와 그 고통을 공유하며 한층 성장하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이 사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시사하는지 알 수 있지요.

자, 한참을 돌았지만 이제 Air로 돌아올 차례입니다. One과 Kanon은 각자 결함을 갖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상실이라는 소재를 잘 이용하며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짜낸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ir는? Kanon에 시큰둥했던 사람들을 열광시키기도 하고, 반면 기존의 팬들에게 외면받기도 했던 Air는 어떤 게임일까요?

Air의 시나리오는 세 개로 나뉩니다. Dream편, Summer편, 그리고 Air편이죠. 이중 드림편은 다시 세 개로 나뉩니다. 미스즈, 카노, 미나기. 드림편의 세 히로인을 클리어하면 이야기가 섬머편으로 넘어가고, 섬머편을 클리어하면 대단원인 에어편이 펼쳐지는 구성입니다. 드림편의 화자(주인공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에어의 진정한 주인공은 미스즈니까요)는 방랑하는 인형사인 쿠니사키 유키토, 섬머편은 무사인 류우야, 마지막 에어편의 화자는 까마귀인 소라입니다. 이들이 각각 '날개를 가진 소녀'와 그 환생의 여정을 추적하며 함께 아파하는 이야기가 Air의 큰 줄기죠.


 
처음에는 DREAM편 시나리오만 선택 가능

드림편의 화자인 쿠니사키 유키토는, 가진 거라고는 퉁명스러운 성격과 너덜너덜한 인형밖에 없는 법술사입니다. 그가 지닌 법술이란 능력은 대를 이어 전해진 것으로, 무려 인형에게 걸음마를 시킬 수 있다는 놀라운 것입니다(웃음). 아이들에게 인형 걸음마를 보여주는 것으로 밥벌이하며 방랑하던 그는 우연히 해변에 접한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 마을은 아주 고적하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배고파 늘어져 있던 유키토는 그곳에서 미스즈라는 소녀와 조우합니다. 미스즈는 말 그대로 유키토를 주워다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해주고, 그는 그곳을 근거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미스즈의 엄마이자 주정뱅이인 하루코, 나사가 단단히 풀린 쌀집 아가씨(아마도 분명히) 미나기, 미나기의 짝패인 성격파탄 꼬마 미치루,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몽상가 카노, 그녀의 언니인 여걸 히지리 등. 모두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죠. 유키토는 차츰 그들에게 얽혀들면서 자기 자신의 비밀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에 양념으로 로맨스가 살짝살짝 곁들여지고요.

드림편은 섬머편, 에어편의 전주인 동시에 셋 중 유일한 연애물입니다. 선택지에 따라 미스즈, 미나기, 카노 중 하나를 공략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실 그리 큰 메리트는 없습니다. 애초에 비주얼 노벨은 스토리를 즐기기 위한 것이지 공략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건 중요한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하는 건데, 미나기와 카노의 스토리는 없어도 저어어언혀 문제가 안될 정도로 무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드림편의 부피를 부풀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앞에서 몇 번 강조했지만 에어는 순전히 미스즈의, 미스즈에 의한, 미스즈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미나기와 카노의 시나리오에도 '날개를 가진 소녀'에 대한 힌트가 슬쩍슬쩍 엿보입니다만 사실은 완전히 끼워넣기의 수준으로, 떼어놓고 봐도 특별히 매력적이지 않고 굳이 서로 연결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죠. 드림편만 따로 떼어내어 보면 그래도 괜찮아요. 에어편과의 연결을 위해 애매하게 끝나는 미스즈 시나리오에 비해, 미나기와 카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고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특히 미나기 스토리는 꽤 잘 되어 있어서 막판에는 제법 눈물을 짜내기도 해요. 유키토-미나기-미치루 삼인방의 섬세한 연결 고리도 매력적이고요. 하지만 어차피 소용없습니다. 섬머편 이후 에어편까지 클리어하고 나면 미나기나 카노의 이야기는 머리에서 깨끗하게 휘발한지 오랩니다. 미스즈 이야기가 너무 강렬한 데다가 나머지 캐릭터는 후편에 등장하지 않으니 존재 의미를 못 느끼게 되는 거예요.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제작사 측에서도 딜레마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미스즈-칸나-미스즈로 3부를 이끌기에는 너무 밍밍했을 겁니다. 볼륨도 작아졌을 테고요. 그러니 적당히 부피를 늘려주는 서브 히로인들을 삽입해야 했을 테고, 미나기는 그 점에서 꽤 효과적으로 기능했습니다. 하지만 카노는 역시 실패한 캐릭터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전 지금 카노 시나리오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미치루와 미나기.

또한 카노와 미나기 스토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유키토가 너무 무성의하게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유키토라는 청년은 미소녀 게임의 남자 주인공치고 드물게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One의 코우헤이와 마찬가지로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인물이죠. 물론 코우헤이는 자신의 고통에 함몰되었고, 유키토는 그 점에서 좀더 자유롭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보자구요. 미소녀 게임의 히어로들은 대개 두 가지의 구실밖에 못합니다. 히로인들을 비추고 플레이어를 대변하기 위한 거울, 그리고 형식상의 구원자입니다. 이 '구원자'의 역할도 사실 대수로운 것은 아닙니다. 히로인 정복을 정당화하고 플레이어에게 대리만족을 주기 위한 명분이에요. 히로인들은 주인공을 통해 거의 일방적으로 치유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치유하는 자와 치유되는 자의 구도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아픔을 공유할 때, 성장은 상호작용적으로 일어납니다. 코우헤이는 나가모리를, 나가모리는 코우헤이를, 이렇게 서로에게 적극적인 촉매로 작용하는 거죠. 하나 대개의 미소녀 게임에서는 이 사실이 무시됩니다. 많은 게임에서 주인공은 자아가 거세된 인물로, 얼굴 없이 오직 그림자나 뒷모습으로만 존재합니다. 유쾌하고 강인하지만 존재 자체로 어필하지는 못해요. 만일 스토리 대신 게임성으로 승부하는 작품이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토리의 부피가 부풀어오를 경우 주인공이 얄팍하면 전체적으로 희박해지고 맙니다. 더구나 스토리를 생명으로 삼는 비주얼 노벨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죠.

이 점에서 Air의 유키토는 아주 좋은 캐릭터입니다. 스토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고뇌하고 행동합니다. 그가 미스즈로 인해 애태울 때 그의 고통은 플레이어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일반적인 미소녀 게임에서 주인공이 적당히 내뱉는 피상적인 독백과는 차원이 다르죠. 그리고-매우 놀랍게도-그는 결국 실패합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결국 그는 미스즈를 구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Air편에서 유키토의 분신인 소라가 단순히 관찰자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유키토의 역할은 Dream편에서 끝나 버리는 거예요. 이러한 분투와 실패는 유키토의 존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미스즈 시나리오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미나기와 카노 시나리오에서의 유키토는 Kanon의 유이치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캐릭터니까요. 그가 카노와 미나기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몇 발짝 떨어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아까운 캐릭터가 오용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영 입맛이 씁쓸합니다. 미스즈를 외면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거야 게임 진행상 다른 방법이 없으니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아무튼 유키토 이후 구원자의 역할을 이어받는 것은 더 이상 히어로가 아닌, '어머니'입니다. 모성이라는 소재는 One이나 Kanon에서도 원인 제공자로, 보조자로, 마음의 지주로, 혹은 배신자등으로 자주 활용된 바 있습니다. 코우헤이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음으로 해서 내면으로 움츠러듭니다. 나유키와 마이는 각각 '모성 상실'에 매달려 고통스러워합니다. 아유는 나유키의 어머니인 아키코상에게 기대어 위안을 구합니다. 일반적인 미소녀 게임이 모성과 부성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 작품의 주제가 일관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성 추구의 정점에서 등장한 캐릭터가 Air편에서의 하루코상이죠.


 그래, 내가 네 엄마야.
이젠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아...

하루코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캐릭터는 카노의 언니인 히지리입니다. 카노와 미스즈는 둘 다 모성 부재의 상황에 놓여 있지요. 카노의 언니인 히지리와 미스즈의 이모인 하루코는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공백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고, 그 틈을 유키토가 비집고 들어와 메우게 됩니다. 카노 스토리에서는 이런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히지리, 카노, 유키토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미스즈 스토리에서 하루코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지요. 유키토는 빈 자리를 혼자 감당하다가 끝내 소멸하고 맙니다. 그리고 돌아온 하루코는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 더 무거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루코는 미스즈의 정신 붕괴에 맞서는 동시에, 친권을 내세워 딸을 되찾으려 하는 미스즈의 아버지 케이스케와도 싸워야 합니다. 그녀가 실제적으로 미스즈의 친모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어려워지죠.

사실 미스즈와 하루코의 관계는 매우 효과적인 설정입니다. 만일 두 사람이 정말 모녀지간이었으면 임팩트가 떨어졌을 거예요. 강요하는 느낌이 들어 식상해질 위험이 다분하니까요. 미스즈와 하루코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짐으로 해서 스토리가 갖는 설득력은 더 강해집니다. 하루코는 미스즈에게서 어머니로 인정 받고 싶어하지만, 한편으로 무너지는 그녀를 지켜보며 무력감에 몸부림칩니다. 미스즈는 자신의 고통에 치여 하루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또다시 구원의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루코가 미스즈의 친어머니였다면 이 관계는 일방통행이 되고 말았겠죠.

여기에서 잠시 섬머편으로 돌아갑시다. 섬머편은 모든 비극의 발단입니다. 미스즈의 전생인 익인(翼人) 칸나는 순수 그 자체인 소녀로, 그녀의 힘을 두려워하는 손에 의해 유폐되어 있습니다. 화자인 류우야는 칸나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고 칸나와 그녀의 시종인 우라하를 데리고 도망칩니다. 그들은 봉인된 칸나의 어머니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나고, 그 와중에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들의 애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라하는 칸나를 사랑하는 동시에 류우야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류우야 역시 칸나를 사랑하면서 우라하를 받아들이죠. 우라하와 류우야는 칸나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의지를 후대에 전합니다. 이 두 사람의 피를 이은 유키토의 어머니는 또다시 자식인 유키토에게 '날개를 가진 소녀'의 이야기를 전하고...이렇게 해서 Dream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림이 좀 분명해지죠?

'어머니'라는 키워드는 섬머편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칸나의 어머니는 이야기의 귀착점이자 시발점입니다. 칸나가 어머니를 만나기 전까지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우라하입니다. 류우야와 우라하가 칸나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듯이, 그 의지를 계승한 유키토 역시 미스즈를 구하고자 목숨을 바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키토에게서 바톤을 이어받은 하루코가 모든 이야기에 매듭을 짓는 거죠. 만일 미스즈의 속박을 푸는 것이 하루코가 아닌 유키토였다면 감동은 반감되었을 겁니다. 결국 강한 히어로와 약한 히로인의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더러, 칸나의 어머니나 유키토의 어머니 등 줄곧 강조되었던 모성의 존재가 허공에 붕 뜨게 되니까요. 하지만 유키토가 소멸하고 그의 의지가 하루코에게 이어짐으로 해서 Air의 스토리는 군더더기 없이 훌륭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한편 시종일관 부각되는 모성에 비해, 부성은 상대적으로 무시됩니다. 이 게임에서 유키토와 류우야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주요 남자 캐릭터는 미스즈의 친부인 케이스케 뿐입니다. 카노는 고아이고, 미나기는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살고 있죠. 케이스케 역시 아내를 잃은 뒤 한동안 딸을 외면합니다. 그가 나중에 미스즈를 되찾고자 하면서 하루코와 케이스케 사이에 중요한 갈등이 형성됩니다. 결국 미스즈는 친아버지인 케이스케 대신 양어머니인 하루코를 선택합니다. 고개 숙인 아버지는 발붙일 자리가 없는 겁니다(웃음). 이거야 진행상 필연적인 설정이니까 어쩔 수 없지요. 마에다 준 역시 이런 편향성이 꽤나 마음에 걸렸는지, 차기작인 클라나드에서는 '아버지'를 앞에 내세워 새로운 구도를 만들려는 모양입니다. 너무 작위적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어쨌든 고무적인 시도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제 외적인 부분들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이 게임은 비주얼 노벨입니다. 아시겠지만 비주얼 노벨은 스토리를 위해 게임성의 상당 부분을 희생하는 장르입니다. Air도 마찬가지여서 Dream편을 제외하고는 아예 자유도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카노와 미나기의 존재가 정당화되는군요) 게다가 카노와 미나기 스토리가 양념에 불구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냥 선택지 자체를 없애고 중심 줄기만 추출해 활자화해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럼 구태여 게임의 형식을 빌 이유가 있을까요? 소설로도 충분히 어필할 텐데. 이건 정당한 의문이지만 구태여 변명하자면, Air는 게임이어야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게임은 엔터테인먼트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수용자와 접촉하는 분야입니다. Air를 플레이하는 사람은 객체인 방관자이면서 동시에 주체인 유키토나 하루코입니다. 이 이야기를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접할 경우 수용자는 미스즈의 고통을 동정하겠지만 그걸 피부로 직감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이게 게임이라는 그릇에 담길 경우, 우리는 단순히 선택지를 클릭하는 것 이상의 권리를 갖게 됩니다. 인물의 고통을 자기 내면에 투사하여 재구성할 수 있는 거예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 이런 공감을 맛보려면 몇 갑절의 상상력이 필요할 겁니다. Air가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고 해도 제가 딱히 그걸 볼지는 잘 모르겠군요. 전 DC판에서 캐릭터에게 음성이 삽입된 것도 별로 달갑지 않거든요. 유키토라는 캐릭터에게 미도리카와 히카루의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그건 감각을 확장시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상상력을 제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고루한 인간이라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요(웃음).

흠, 어쨌든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미나기와 카노의 존재에 대해서도 보다 강하게 변호할 수 있겠네요. 미나기와 카노는 유키토(플레이어)에게 주어진 또다른 가능성인 거예요. 앞서 저는 이들의 존재가 볼륨을 부풀리기 위한 도구로만 쓰였다고 했지만, 방향을 바꿔 본다면 어느 정도 필연적이기도 합니다. 만일 유키토가 미나기나 카노를 택할 경우 미스즈는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유키토 역시 대대로 전해진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겠죠. 하지만 적어도 그는 다른 파트너와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수도 있을 거고, 또 자식을 낳아 못다 이룬 의무를 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야기는 완결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추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두 개의 가능성을 확인한 뒤 각오를 다지고 미스즈 구출에 몰입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이유로 저는 드림편을 카노-미나기-미스즈 순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확장성은 게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스토리에 좀더 설득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요.

음악, 연출, 디자인 등에 대해서는 말을 줄이겠습니다. 연출은 예전부터 그랬듯 굳이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특히 결말부의 연출에 대해서는...다시 떠올리면 그저 눈물밖에 나지 않는군요. 여름이라는 시간적 배경 역시 아주 효과적으로 설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여름은 비극을 연출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감이 있는데, 이 게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잘 쓰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나른하고 축 늘어져 있기 때문에 파토스가 남발되지 않습니다. 감정을 돋운답시고 시종일관 눈이나 벚꽃잎이 흩뿌리는 건 사실 좀 진부하잖아요.

캐릭터 디자인에 대해선 말이 좀 많죠. 로리형 캐릭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어필할 만한 디자인은 아니에요. 하지만 진행하고 있노라면 어차피 그런 건 다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CG의 수준은 같은 시기 발표된 게임들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음악은 다 제쳐놓고 주제가인 '새의 시' 하나만으로도 백점 만점을 줄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뭐 취향의 문제지만 클리어하고 나면 이 노래가 주문처럼 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거든요=)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Air는 약간의 결점을 안고 있지만 그걸 전부 상쇄할 정도로 강렬한 게임입니다. 환생, 의무의 계승, 기억, 운명에 의한 속박, 극복, 성장 등 꽤 구태의연한 소재들을 굉장히 깔끔하게 버무려내 재활용한 작품입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할 당시 저는 현재 교정중인 소설의 중간 부분을 쓰고 있었는데, 클리어 이후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지더군요. 비슷한 주제에 천착하는데도 어쩜 이렇게 수준이 다른가 싶었지요. 뭐 종종 하는 얘기지만 그게 대가와 범인의 차이일지도...(웃음)

역시 Dream편의 나머지 스토리들은 아쉬웠고, Summer편 역시 조금만 더 다듬었더라면 싶은 구석이 있었지만 밸런스는 제법 잘 잡혀 있는 편입니다. 대단원인 Air편은 그 자체로 충격과 감동의 폭풍입니다. 엔딩 처리에 대해 불만도 꽤 많았다고 알고 있는데, 제 가벼운 머리로는 그 이상의 결말이 생각나지 않네요.

끝으로 글이 터무니없이 지리멸렬해진 것에, 그리고 숱한 네타바레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좀더 충실한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역시 클리어한지 1년 넘게 지나고나니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여간 큰일이 아니군요. 보시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끝부분을 멋지게 맺으려고 했건만 이쯤 쓰고 나니 체력고갈이라서 말이죠^^;
by 루리루리 | 2004/05/26 22:26 | 게임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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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tarless at 2004/05/26 23:21
다시 못 보리라 생각했던 글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니 기쁩니다. Air에 대해서는 저도 언제고 한 번 얘기를 풀어놓고싶긴 한데 이렇게 너무 요점들을 잘 짚어주신 걸 보니 감히 뭔가 써볼 엄두가 안 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이후로 자극의 역치가 너무 높아져버린 탓인지 어지간한 노벨게임으로는 별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클라나드는 부자관계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유형의 '가족관계'가 주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마에다 준이라는 시나리오라이터가 계속해서 천착해온 주제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캐릭터 자체는 사카가미 토모미가 제일 취향이었지만 개인별 시나리오는 미사에씨가 현재까지 플레이한 바로는 가장 마음에 든 편이었습니다. 이거야 나중에 직접 해보시면 아실 문제라 봅니다. 아무튼 빨리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Commented by ColoR at 2004/05/27 22:13
지나가다가 Air 이야기가 나와서 슬쩍 [..]

Air, 전 클리어하고 나서 몇달간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습니다. 엄청난 후유증이었지요. [...] 그저 멍하니 떠오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정도로..

작품의 결말에 대해서는 가장 난해하달까, Key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난해함에 있어서는 Air가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때문에 엔딩의 해석에 있어서도 만족하는 사람과 불만족하는 사람이 크게 나뉘어지기도 하구요. (전 명확히 드러나는 해피엔드쪽을 선호하는쪽인지라..) 나름대로 결말에 대해서 좀 생각해온게 있는데 지금 꺼내자니 오래되서 어떻게 풀어나가야할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 / 클라나드는 Air 보다 Key의 역량이 한층 발전된 모습이 보입니다. 충격이나 자극에 있어서는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더 높게 쳐주고 싶네요.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29 22:58
Starless님/ 저도 CD에서 다시 발굴해내고 기뻤습니다^^ 지금 읽어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썼던 글과 만나는 것은 즐겁네요. 그렇지, 내가 Air를 이런 심정으로 플레이했지 하는 아련한 기분도 들고. 하여간 참 느낀 점도 많고 할 말도 많은데, 막상 풀어놓으려 하면 좀처럼 시원스레 쏟아지지가 않는 게임이에요.

어째서 멋대로 클라나드가 '아버지' 중심의 가족관계를 피로하는 게임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냐면...그건...그건 어디까지나...Key에서 공개한 캐릭터 설정을 보고 아키오 씨에게 반해 버려서; 언뜻 취향이 아니었던 나기사쨩도 아키오 씨의 따님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쁘게 공략할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에엥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쨌건 한시라도 빨리 플레이하고 싶은데, 공연히 아이콘만 바라보며 침을 삼키는 나날입니다앙.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29 23:00
ColoR님/ 안녕하세요 ColoR님>ㅅ<)/ 늘 ColoR님 블로그를 노조키하면서도 감히 뭐라고 남기지 못한 소심쟁이 루리루리인데, 이렇게 와 주셔서 기쁩니다.

Air...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신욱신 아파오는 게임이죠. 이제 거의 회복되었다 싶었는데 위의 미스즈&유키토 커플 그림을 보는 순간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단 말입니까; 엔딩을 본 뒤 한동안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제 게임 인생 15년에 그토록 절절하게 무력감을 느낀 경험도 없고, 분노에 고통에 슬픔을 스테레오로 맛보면서 망연자실해 있던 경험도 전무했으니까요. 저 역시 해피엔딩을 기원하고 또 기원했습니다만, 종내는 아픈 마음으로 납득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우린-유키토하고 하루코상에게 동시에 감정이입해서-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미스즈도 마지막까지 웃어주었으니까,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하고 열심히 스스로를 설득하면서...(그런데 그게 또 엄청 괴로운 거 있죠;)

하아, 아무튼...이제 다시 클라나드를 앞에 두고 기대 반 근심 반으로 주저하고 있는 루리루리입니다. 작품 퀄리티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또다시 닥쳐올 후유증이 두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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