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의 꿈
이것은 오늘 낮잠을 자던 중 꾼 꿈 이야기.

어느 항구 마을에 막노동으로 그날그날 벌어먹고 사는 루피 D. 몽키라는 영감님이 계셨습니다. (영감님이라 해도 50세쯤) 영감님은 젊은 시절 전설의 비보 '원피스'를 찾아 해적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혈기 왕성한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떠났지만, 끔찍한 시련들 앞에서 결국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고, 이후로는 혼의 반쪽이 죽어 버린 것처럼 공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20년 전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마음 붙일 상대도 없이, 이따금 옆 마을에서 검술 사범을 하고 있는 옛 동료 조로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으로만 위안을 받는 처지였습니다. 한때는 '악마의 열매' 능력자로 세간의 두려움을 산 거물급 현상범이었지만, 열매의 약빨이 다 떨어진 지금은 우락부락한 근육과 팔뚝의 문신만이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을 뿐. 조로 외의 다른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조로에게는 나미라는 어여쁜 외동딸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일류 검객인 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워, 웬만한 사내에게도 절대 지지 않는 배짱과 실력을 자랑하는 아가씨였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루피의 전설적인 무용담을 들어 온 나미는 서른 살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영감님을 대놓고 흠모하였지만, 루피의 눈에 그녀는 딸뻘 되는 귀여운 철부지에 불과했습니다. 나미 양은 헛헛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버지와 루피의 열정을 다시 일으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위대한 항로에서의 두려운 경험이 아직까지도 집요한 악몽으로 남아 있던 까닭에, 소녀의 피끓는 설득에도 영감님들의 지친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미는 아버지들의 뜻을 이어 원피스를 찾아 나서겠다는 뜻을 품었지만 하나뿐인 딸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조로 영감님의 감시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한 잔 걸치기 위해 주점에 들른 루피와 조로는 선원들의 대화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을과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약장수를 하고 있던 옛 동료 우솝이 어떤 비밀 때문에 해적들의 추적을 받다 끝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물어물어 우솝의 집을 찾아간 루피와 조로는 미망인으로부터 봉인된 문서를 받게 됩니다. 그 문서는 바로 위대한 항로와 원피스의 비밀을 담은 해적왕 故 골드 로저의 항해일지였으며, 비보를 손에 넣기 직전 좌절했던 루피들은 이제 유력한 열쇠가 될 노트를 앞에 놓고 데식은 피가 다시 끓어오르는 흥분을 느낍니다. 일지를 읽고 또 읽으며 며칠 밤낮을 고민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하여 위대한 항로에의 재도전을 결심합니다. 루피는 수소문 끝에 레스토랑의 오너가 되어 있는 상디와 의사가 된 쵸파를 찾아내고, 그들을 설득하여 결국 동의를 얻어냅니다. 네 사람은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배를 사고 오랜 항해에 대비하여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우솝의 빈 자리를 채울 다섯 번째 동료를 물색하는데, 나미가 기를 쓰고 지원했지만 조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분개한 나미는 조로의 눈을 피해 항해기술을 익히면서 다른 배를 타고서라도 떠날 계획을 세웁니다.

한편 마땅한 인재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루피는 우연히 시장 거리에서 그의 주머니를 털고 달아나려던 소매치기 소년을 붙잡게 됩니다. 검은 머리에 총기 어린 눈동자를 지닌 소년은 마치 루피 자신의 젊은 날과도 같은 모습이었고, 비록 뒷골목을 누비는 부랑아였지만 늘 바다에 대한 동경과 정열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번에 그의 진가를 알아 본 루피는 배에 타지 않겠냐고 제안하고, 일찍이 루피 일행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소년은 기뻐하며 받아들입니다. 본격적인 항해에 앞서 네 어르신들에게 투철한 지도를 받던 소년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노력하는 나미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여전히 루피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나미는 소년의 구애를 물리치지만, 점차 솔직하고 씩씩한 품성에 호감을 느끼고, 결국은 그를 친구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그녀는 이미 다른 배에 항해사로 고용되어 루피 일행이 떠난 이틀 뒤 위대한 항로로 출발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소년에게 귀띔합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라이벌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결코 서로를 잊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하는 일 없도록 하자고 약속합니다. 나미는 오래 전 루피에게 선물 받은 밀짚모자를 약속의 증표로 소년에게 씌워줍니다.

마침내 배가 떠나는 날. 갑판에서 부두를 바라보며 나미를 기다리는 소년. 닻이 올라가고 배가 미끄러지는 순간 멀리서 나미가 달려옵니다. 그녀는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대고서 "위대한 항로에서 만나자!"라고 외치고, 소년은 밀짚모자를 흔들어 보임으로써 답합니다. 육지가 완전히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년은 모자를 꾹 눌러 씁니다.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난 조로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소년의 어깨에 큼직한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어째 굉장히 구체적인 꿈이지요^^; 가끔 이렇게 스토리가 있는 꿈을 꿀 때가 있는데, 전에는 '바벨의 도서관'의 사서를 사랑하는 못생긴 여자애가 된 적도 있었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 이런 꿈을 꾸면 엄청 횡재한 기분이 듭니다. 정말이지 인간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아스트랄한 우주가 있을 것 같지 않나요?


덧 : 재미있었던 부분은 배를 구경하던 소년이 자기가 지낼 선실 문을 열자, 정면에 조그만 가미다나가 있고 그 위에 우솝의 사진과 향이 놓여 있었다는 것.

덧 2 : 또 하나 재미있었던 부분. 루피와 조로가 자주 가는 주점 오너는 <삐리리~불어봐! 재규어>에 나오는 미스 팬티스타킹이었답니다! 거기다 술집을 들락날락하는 날백수 빌리(로봇 민토를 키우는 그 사람 말이에요)가 남몰래 미스 팬티스타킹을 짝사랑한다는 설정. 결국 빌리 군은 루피의 격려를 받고 미스 팬티스타킹에게 고백을 해서, 단번에 OK라는 대답을 얻어내게 됩니다. 이야아 이것 참 축하할 일이로군요, 하하하.
by 루리루리 | 2004/05/21 23:08 | 잡담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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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지케이오 at 2004/05/22 00:00
왕 재밌다! 퍼가도 될까나?
Commented by Starless at 2004/05/22 00:01
....원피스 본편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고 팬픽으로 써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P.S.1 그 루피 이미지 묘사하자 왠지 생각나서 올려보는 하드 안에 있던 이미지.
http://starless.pe.kr/temp/108246689438409.jpg

P.S.2 소년은 혹시 존경하는 인물이 존 실버이며 이름은 짐 호킨스라든지 하진 않았습니까?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22 19:52
지케이오/ 아, 물론이죠! 재미있다니 다행이에요^^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22 20:10
Starless님/ 푸하하 이거 의외로 너무 잘 어울리잖아요! 그런데 루피 영감님, 저 연세가 되어도 여전히 빨간 조끼 하나 딸랑 걸치고 계실까요^^

꿈인데도 이미지가 굉장히 선명하게 남아서, 그림만 잘 그리면 만화로 옮겨 봤을 텐데...진짜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잠이 깬 뒤에도 한참 누워서 싱글벙글했지요. 음성까지도 리얼하게 귓가에 남아 있다니까요:D

사실 저런 느낌, 제 취향이에요>ㅅ< 여러 가지 사연을 품은 항구 마을이라든가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이라든가, "그래도 난 아직 날 수 있어"라는 식으로 씁쓸하면서도 옹골찬 독백.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 엔딩은 그래서 심장에 직격타였죠.
Commented by 리노 at 2004/05/24 22:54
아.. 7th Sea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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