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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인용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면, 소설의 서두는 '퍼짐새가 있는 문장'이어야 합니다. 이 '퍼짐새가 있는 문장'이란 무엇인가. 멋을 부려 그럴듯하게 장식한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할지라도 뒤에 따라올 이야기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한두 줄. 서두가 화려하면 따라오는 문장들이 그에 눌려 빛이 죽지 않도록 기를 쓰고 자신을 치장하게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이야기 전체가 주렁주렁 불필요한 장식들을 다는 셈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진정 뛰어난 서두란 촌철살인과도 같아, 짤막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이야기 전체에 퍼져 나가는 힘을 지녀야만 합니다. 이상이 제가 이해하는 '퍼짐새가 있는 문장'인데, 그 점에서 보면 루리루리의 글은 엄청 실격인 거죠(웃음). 개인적으로는 머리를 쥐어짜 치장하는 문장이란 어디까지나 2류로, 좋은 문장가는 거미처럼 가벼운 몸짓만으로 전신에서 광택을 띤 실을 줄줄 뽑아내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퍼짐새가 있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서두란 무엇이 있는가. 당장 생각나는 것은 저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이로군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캬-! 좋지 않습니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후로 거침없이 분등하는 시마무라의 기찻간 묘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불후의 명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뒤에 따라오는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도 잊을 수 없는 구절이지요. 사실 <설국>은 10여년에 걸친 퇴고로 그 자체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미문의 보고이지만요. 그 외에 기억나는 것이라면 <앰버 연대기>의 '끝이 시작되고 있었다.'와 <어둠의 왼손>의 '어릴 적 나의 고향에서는 진리는 상상의 문제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내 이름은 콘라드>의 '"당신은 칼리칸자로스예요."' 정도? (편애가 드러나는군요, 낄낄) 잡히는 대로 몇 개를 더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독일의 어느 발라드에 죽은 사람들은 발걸음이 빠르다는 구절이 있는데, 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세 사람>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 윌리엄 아이리시, <환상의 여인>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영원한 재귀는 아주 신비스러운 사상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허리의 불꽃.'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어린아이가 불길한 새처럼 문에 못박혀 있었다.' - 다니엘 페낙, <말로센 말로센>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 폴 오스터, <달의 궁전> **** 물론 위에 열거한 것처럼 시적인 풍미를 지닌 문장들만이 '퍼짐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사의 물꼬를 트는 데에는 일상적인 문장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죠.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까라마조프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3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이고도 의문투성이의 죽음으로 인해 한때 상당히 널리 알려진 우리 군의 지주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의 셋째 아들이었다.' - 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재산깨나 있는 남자가 독신일 경우에 아내가 필요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나는 1946년 11월에 잭 케네디를 만났다.' - 노먼 메일러, <아메리카의 꿈> '6피트에서 1, 2인치쯤 빠지는 키에 몸매가 다부진 그가 약간 어깨를 구부리고 얼굴을 앞으로 조금 내민 채 눈을 내리깔고 상대에게 똑바로 다가서는 모습은 흡사 황소 같았다.' - 조셉 콘래드, <로드 짐> 위의 예들은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한두 줄 안에 주제를 함축하고 있거나, 독자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퍼짐새가 있는 문장으로 서두를 잡아놓으면 작가의 입장에서는 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술술 이야기가 풀려 나오게 마련이며, 독자 역시 비평가의 눈길을 거두고 홀가분한 독서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요컨대 '좋은 소설'의 요소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일상적이든 시적이든 퍼짐새가 있는 문장이란 게 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경험이 안목을 키우는 법이니, 다독가일수록 한눈에 알아보기도 쉬울 거예요. 그 뒤에는 번역이라든가 취향의 문제가 있고, 당연하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서두는 마음에 들지만 뒤로 갈수록 영 별로인 경우가 있고, 서두는 별로였지만 읽을수록 빠져드는 소설도 있고. 전자의 경우 말 그대로 용두사미인 소설, 후자의 경우 처음에는 갈피를 못 잡다가 서서히 힘이 붙어 재미있어지는 소설입니다. 물론 진정한 대가란 처음에 독자의 눈길을 휘어잡은 뒤 그 기세를 늦추지 않고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어려운 것은 독자로서는 이와 같은 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데, 작가로서 구현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input은 되는데 output이 안 된다는 얘기. 하기야 창조자와 모방자(필리프 브르노에 의하면 천재와 재간꾼) 사이에는 천부적 재능이라는 아득한 거리가 있으니, 머리로 이해한다고 다 되면 세상이 온통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만 뒤덮여 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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