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동안 읽은 책들
지난 한주간 읽은 책들입니다. 요즘은 이래저래 바쁜 탓에 전철 안에서나 욕조 속에서 찔끔찔끔 들여다보는 편이라, 하루에 한 권 이상 읽기가 힘들군요.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부담이 없는 추리물에 자꾸 손이 가네요^^; 모처럼이니까 리뷰도 길게 쓰고 싶은데 이놈의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서. 하지만 <검은 집>은 나중에라도 제대로 된 리뷰로 다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앨프레드 메이슨의 <독화살의 집>입니다. 미스터리 황금기에 나온 고전인데, 이 방면의 마니아라면 꼭 한번은 읽어야 할 책으로 종종 추천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째, 번역 문제인지 뭣 때문인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꾸물꾸물 사흘만에 겨우 다 읽었습니다. 추리소설은 앉은 채로 깨끗이 소화하는 편인데 이상하죠. 재미가 없었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닌데.

내용은 평범합니다. 미와 부를 한꺼번에 소유한 가련한 상속녀가 악한의 위협으로 궁지에 몰리자, 명탐정 아노가 등장하여 그녀를 구원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뛰게 됩니다. 그 와중에 비운의 상속녀는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변호사와 사랑에 빠지고...등등. '애거서 크리스티의 냄새가 난다'라는 평도 있던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루리루리는 '위기에 빠진 미모의 상속녀'라는 설정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불만이 없었습니다만, 범인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에 진상이 밝혀질수록 애가 타더군요. 결국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라지만 이래서야 개운하지 않잖아요(투덜투덜).

'문학적 향기가 높다'라고 뒷표지에 적혀 있지만 별로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인물 묘사는 비교적 잘 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막판 뒤집기'로 밝혀지는, 범인과 탐정의 숨가쁜 심리전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합니다. 그래도 이 자리를 빌어 분명히 외치건대 아노 탐정을 셜록 홈즈와 비교하는 것은 너무해요! 스타일에 얼마간 유사성은 있을지라도 홈즈의 비할 데 없는 개성과는 1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아.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작품, 크리스티 여사의 <나일강의 죽음>. 친구와 애인에게 배신 당한 소녀의 복수라는 통속적인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는 소설이죠. 사실 트릭은 트릭으로, 내용은 내용으로 나눠서 즐겨도 손해 보지 않는 것이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매력인 만큼, 이 소설도 어느 쪽에 초점을 두어 보든 만족할 만합니다. 앞서 말했듯 루리루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름다운 상속녀에 매우 약한 편입니다만, 여기의 리넷 리지웨이 양에게는 한 치의 동정도 가지 않더군요. 진상이야 어쨌든 친구의 연인을 빼앗으려 안달하는 공주병 환자라는 것만은 틀림없었으니...-_-

피터 러브제이의 소설 <밀랍인형>입니다. <가짜 경감 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집어들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도 작가의 독특한 매력은 변함이 없어 즐거웠던 소설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긴박감, 반전 한 방과 맛깔스럽게 곁들여지는 블랙 유머까지, 잘 짜여진 추리소설의 미덕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시종 눈을 떼지 못하고 읽었습니다. 머리를 핑핑 굴려야 하는 치밀한 트릭은 없지만 진상에 접근할수록 서늘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 러브제이의 <마지막 형사>도 헌책방에서 돌고 있는 모양인데 꼭 구하고 싶군요.

이스라엘 작가 체루야 살레브의 <남편과 아내>입니다. 주제는 잘라 말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랄까요. (제목만 들어도 대충 감이 잡히잖아요^^;) 무척이나 사랑해서 결혼한 남녀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랑이 속박으로 변하자 서서히 지쳐 가고, 결국은 환멸과 연민, 혐오 속에서 서로를 파괴하는 데에만 몰두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이 쉼표로만 연결되어 있고 따옴표 하나 없어서 읽고 나면 굉장히 피로해져요. 그런데도 몸서리를 치면서 두 권을 몽땅 읽어 버린 것은, 작가의 문장이 워낙 미려하기도 하거니와 단순히 권태에 빠진 부부의 푸념이라 보기에는 너무나도 치열한 공방이어서 도중에 덮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읽는 동안 줄곧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쥐어뜯고 싸우는 장면이 연상되더라구요^^;) 추리소설을 읽을 때에도 늘상 느끼는 거지만 이 '남편과 아내'라는 조합은 진정 애증의 결집체로군요.


앰브로스 비어스 外 여러 작가들의 호러 앤솔로지입니다. '호러'라고는 해도 사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아요. 기대했던 비어스의 단편 정도만 만족스럽고, 나머지는 평범한 수준. 베노 플루드라의 '개와 바다'와 헤닝 파벨의 '완성하라!' 정도가 따로 마음에 든 작품인데, 그것도 솔직히 개인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으로, 플루드라의 소설은 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파벨의 것은 글쟁이로서의 공감으로...어디까지나 이 정도입니다(웃음). 사실 어떤 분이 평하셨듯 요즘 세상에 늑대인간이나 13일의 금요일 정도를 가지고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필력이 뛰어나서 흔한 소재를 눈부시게 세공하여 내놓는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에잇, 돈이 아까워!"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도(일단은 싸게 샀으니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습니다.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입니다. 사실 오늘 리뷰는 오로지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녜요. 이른바 "Two thumbs up!"이랄까요. 세련된 맛은 좀 떨어지지만 그 대신 호러의 본분에 극도로 충실하여, 스티븐 킹 이후 간만에 장편을 읽으면서 뼛속까지 시려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링>이나 <패러사이트 이브> 같은 여타의 일본 호러소설들은 재미는 있었어도 전연 무서운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 소설은, "인간의 마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진부한 문장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초현실성이나 과학의 영역 이전에 우리 일상의 문제로 이야기를 축소하면서 숨이 막힐 만큼 어두운 구렁텅이로 시선을 이끌어 갑니다. 호러, 스릴러, 추리가 잘 버무려진 절묘한 구성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고요. 절판된 책이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물건'이라는 분위기로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인데, 저도 아낌 없이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같은 작가의 <푸른 불꽃>도 꼭 읽어 보고 싶네요.


덧 : 현재 읽고 있는 책 - H. 라이더 해거드 <솔로몬 왕의 보물>, 조셉 콘래드 <로드 짐>(소설 읽다가 감동해서 호흡곤란 일으킨 것은 또 처음),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세 사람>.

덧 : Starless님 죄송합니다. 빌려주신 계정인데 매번 이렇게 이미지 파일을 잔뜩 올려서^^;;
by 루리루리 | 2004/05/03 17:32 |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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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tarless at 2004/05/03 20:24
와하하 어차피 그러시라고 빌려드린 겁니다. 어차피 홈 내용물의 대부분을 텍스트로 채우고 이미지도 가뭄에 콩나듯 넣는 저로선 그 트래픽이나 계정용량 다 쓸 날은 어지간해선 찾아오기 힘들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Commented by 사이암 at 2004/05/03 22:28
오늘 책 도착! 잘 읽겠습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ㅁ; 잘 차린 밥상 앞에 놓고 이타다키마스~ 하는 심정. 요즘은 정말 기분전환에 추리소설이 가장 좋더군요. 저 검은 집 읽어보고 싶었는데 절판이라니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중입니다.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04 16:51
Starless님/ 감사합니다 흑흑T_T 별없음님은 제 구세주세요(덥썩).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4/05/04 16:55
샴언니/ 앗 도착했나요, 다행이어요>_< (가, 갈피에 루리루리의 연서가 끼워져 있는데 보셨을까요;) 역시 머리가 복잡할 때는 추리물만 한 것이 없지요. 동서추리문고의 부활로 읽고 싶은 책들은 많은데 돈도 없고 큰일이어요. 학교 도서관에 들어와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검은 집>은 정말로 재미있었어요! 근래 헌책방에서 건진 책들 중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과 함께 최고의 대박이었어요. 다음에 뵙게 되면 빌려 드릴게요. 언니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Commented at 2004/05/05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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