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

아가씨들과의 약속도 어기고(맨날! 매번! ㅠㅠ), 눈에서 피가 쏟아질 정도로 바쁘게 달린 일주일이었습니다만, 금요일에 근사한 보상을 받았네요.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어둠속의 작업>을 드디어 손에 넣었습니다. >_<

사실 이 책은 제 예전 직장인 ㅎ사에서 나온 책입니다...거의 30년 전에요. 지금은 인문서 출판사로만 알려진 ㅎ사지만 왕년에는 문학에도 제법 손을 댔고, 추리소설도 몇 권 낸 바 있는데 이 책은 '한길세계문학' 시리즈 제8권으로 출간되었어요. 이 '한길세계문학' 시리즈로는 리처드 라이트의 <토박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쇼>, 쿠스완트 싱의 <파키스탄행 열차>,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 등 뛰어난 문학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들이 주로 나왔는데 지금 봐도 참으로 훌륭한 엄선입니다. 1976년 간판을 올린 뒤 80년대 들어 궤도에 오른 ㅎ사의 야심과 의욕이 선명하게 드러난 선집이지요.

저는 이중 몇 권을 어렵게 구해 소중히 간직해 왔는데, 하필 가장 읽고 싶은 유르스나르의 책만 도저히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갖고 계신 분들이 진가를 알고 내놓지 않으시는 건지, 헌책 시장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고, 어쩌다 나와도 간발의 차로 놓치고...ㅎ사에 입사했을 때도 제일 먼저 관리부로 달려가 재고 여부를 물었습니다만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기에 대실망. 혹시나 해서 사장님 안 계실 때 사장실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더랬지요.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원서로 읽는 수밖에 없나 하던 참에, 며칠 전 드디어 헌책사랑 사이트에서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정가 3,500원짜리 책이 7,000원에 나와 있었습니다만 가격이 문제입니까, 당장 질렀습니다. 오늘 받아 보니 초판인데도 상당히 깨끗해서 값을 두 배나 치르고 산 보람이 있네요. 유르스나르의 책은 문장 하나하나를 자근자근 씹으면서 지긋이 읽는 게 맛이고, <어둠속의 작업>은 그녀가 20대 때 구상하기 시작해서 60대에 완성한 그야말로 라이프워크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다른 책들을 밀어 두고 이것만 붙들고 있으렵니다. 요즘 후딱 읽고 후딱 팽개치는 가벼운 책들만 읽다가 간만에 묵직한 감촉을 느끼니 콧속이 찡하네요. 주문한 <로드>도 곧 도착할 것이고, 저희 회사의 신간인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도 받았으니 한동안 허기질 일은 없겠습니다. ^^


덧: 혹시 이디스 워튼의 팬 계신가요? 저는 요새 그녀에게 완전히 꽂혔습니다. <순수의 시대>, <암초>, <이선 프롬>을 모두 읽고 뭐 다른 거 없나 침 흘리며 찾고 있어요. 미셸 파이퍼와 위노나 라이더가 나온 영화 <순수의 시대>도 한번 찾아보려고요.

덧2: '한길세계문학' 제1권은 앙드레 말로의 <희망>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이상하게 <인간의 조건>이 다시 읽고 싶어져서 엉덩이가 들썩거렸어요.
by 루리루리 | 2008/07/04 20:14 |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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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치이나 at 2008/07/04 22:07
주신 슌킨쇼는 정말 좋았어요~! 이야기들 중에 역시 슌킨쇼가 제일 취향이더라고요. 다니자키 단편들의 그런 느낌을 너무 좋아해서 사실 세설은 조금 뜨악했어요.ㅎㅎ 재미는 충분히 있었지만.
Commented by EREBUS at 2008/07/11 14:00
한길세계문학 시리즈 목차를 혹 알고 계씨면 시간날 때 좀 적어 주시겠어요^^
Commented by 당근 at 2008/08/19 17:01
오랜만에 덧글 남깁니다. (그것도 엄청 뒷북으로;; 잘 지내셨나용>.<)

Edith Wharton, 전 순수의 시대 보고 홀딱 반해서 House of Mirth를 샀다가,
그거 읽고 완전 침몰했어요. 제목만 보고 낚여서, 와우 이 작가 특유의 풍자랄까 은근한 유머를 한껏 볼 수 있는 작품이겠군!! 이라고 샀다가 읽고나서는 왜일케 우울해!! 였어요.OTL
그래도 House of Mirth, 한 번 볼 만한 작품입니다. 순수의 시대에서 은근하게 풍기던 미국 상류층의 음습함이 여기선 아주 제대로 나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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