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를 움직인 책 100선’에 <율리시즈>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간 <캐치-22>는, 명작의 문학적 기품을 기대하며 책을 펼친 독자들에게 당혹감부터 안깁니다. 대뜸 고개를 쳐드는 당돌한 서두로 이야기는 코믹하게 시작됩니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의 섬 피아노사. 공군 대위 요사리안은 꾀병을 구실로 병원에 숨어 전투를 피하고 있습니다. ‘황달이 될락 말락 한’ 상태로 의사와 간호사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요사리안은 남의 편지를 검열하면서 멋대로 내용을 지우거나 왜곡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의 평화는 지지리 오지랖 넓고 애국적이며 선량한 텍사스인 때문에 산산조각 나고, 모든 환자들은 텍사스인의 짜증나는 요설을 피해 병원을 집단 탈출해 부대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출발한 이야기는 어지러울 만큼 장황한 문체로 수선스럽게 펼쳐집니다. 요사리안을 둘러싼 상황은 한없이 희극적이고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공전(空轉)합니다. 작중에서 계속 언급되는 ‘데자뷰’ 현상처럼 한 사건이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며 숨겨진 측면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쳇바퀴에 물려 함께 돌아가는 인물들은 전부 괴짜거나 미친놈들이에요. 취사 장교인 마일로는 전 세계를 주름잡는 신디케이트를 조직해서 군 수뇌부까지 한손에 쥐고 흔들고, 과거 <라이프>지의 사진기자였던 헝그리 조는 낮에는 누드 사진을 촬영하려 뛰어다니고 밤에는 고양이에게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부대원들을 들쑤시고, 가는 곳마다 석유를 불러들이는 인디언 화이트 하프오트 추장은 그 때문에 매번 거주지에서 쫓겨나 끝내는 군대로 흘러들고, 메이저 메이저 메이저라는 이름 때문에 고통 받는 소령(major, 즉 ‘메이저 메이저 메이저 메이저’)은 누가 자기를 찾아올 때마다 창문을 넘어 도망치고, 요사리안에게 앙심을 품은 창녀는 식칼을 들고 지구 끝까지 그를 추격하여 죽이려 듭니다(요사리안이 전투기 창밖으로 그녀를 던져 버렸음에도!). 이악스럽고 멍청한 윗대가리들은 공훈에 눈이 멀어 쉴 새 없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몹니다. 이들이 앵무새처럼 주고받는 의미 없는 대화들은 이오네스코의 희곡 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귀관은 겁이 많은 녀석이구먼, 안 그런가? 귀관더러 자세히 밝히라고 얘기한 사람도 없는데 귀관은 나한테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어. 난 발언을 했지,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어. 귀관은 겁이 많은 녀석이야, 안 그런가?” “아닙니다, 대령님.” “아닙니다, 대령님이라니? 그럼 귀관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대령님.” “그럼 귀관은 겁이 많은 녀석이야, 안 그런가?” “아닙니다, 대령님.” “자넨 겁이 많은 녀석인가?” “아닙니다, 대령님.” “염병할, 귀관은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고 있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난 이 커다랗고 거지같은 책상을 뛰어넘어가서 귀관의 형편없고 비겁한 몸에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어.” “그러십쇼! 그러십쇼!” 메트카프 소령이 소리쳤다. “메트카프, 이 더러운 새끼. 귀관의 더럽고, 비겁하고, 바보 같은 입 좀 닥치라고 내가 그러지 않았나?” “그랬습니다, 대령님. 죄송합니다, 대령님.” “여러분.” 카르길 대령은 말을 쉬어가면서 요사리안의 비행중대 대원들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미국의 장교입니다. 세계의 어느 다른 나라 군대도 그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생각을 해봐요.” 나이트 병장은 그 말을 생각해 보더니 카르길 대령에게 점잖게 지금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사병들이고, 장교들은 비행중대의 다른 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귀띔을 해주었다. 카르길 대령은 상냥하게 고맙다고 그에게 인사하고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씩씩하게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스물아홉 달 동안 복무를 했어도 무능함이라는 그의 천재성이 조금도 둔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이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 아래 시퍼런 칼날을 감추고 있듯, <캐치-22>의 본질은 비극입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아메리칸 풍’ 재담으로 가장한 섬뜩하고 가슴 미어지는 진짜 비극입니다. 앞장에서 기숙사의 대학생처럼 유쾌하게 소란을 피우고 떠들던 젊은이들이 뒷장에서는 내장을 줄줄 흘리거나 몸이 반 토막 나서 죽어 갑니다. 그들은 그 비극성을 어렴풋이 깨닫고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만 노력이 거세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더 부조리한 농담이 되어 갑니다. 그리하여 멋모르고 낄낄대던 독자들이 실상을 눈치 채고 아연해질 때쯤에는 이미 독자 역시도 가혹한 상황의 관조자이자 공범이 되어 있습니다. 요사리안은 스노든의 방탄복 자락을 찢어 열고는 그의 내장이 바닥으로 축축한 덩어리처럼 흘러내리고 계속해서 뚝뚝 떨어지자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3인치도 넘는 거대한 고사포탄 파편이 다른 쪽 겨드랑이 밑을 뚫고 들어가 관통하고는 스노든의 얼룩얼룩한 내장을 휘감고 밖으로 튀어나오며 그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다. …… 스노든이 더러운 바닥에 온통 쏟아놓은 흉측한 비밀을 허탈하게 내려다보면서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창자가 전하는 뜻을 이해하기는 간단했다. 인간이란 물질이다. 이것이 스노든의 비밀이었다. 창문에서 던지면 그는 떨어지리라. 불을 붙이면 그는 타버리리라. 그를 묻어버리면 다른 쓰레기나 마찬가지로 썩으리라. 영혼이 사라지면 인간은 쓰레기이다. 그것이 스노든의 비밀이었다. 모두가 곪았다. 바로 그날 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 이상을 일으켰을까? 얼마나 많은 바퀴벌레들과 집주인들이 승리를 거둘까? 얼마나 많은 승리자들이 패배자이고, 성공이 실패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일까? 얼마나 많은 똑똑한 녀석들이 바보일까? …… 얼마나 많은 성자다운 사람들이 부패했고, 신뢰가 필요한 자리에 앉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푼돈을 위해 그들의 영혼을 불량배들에게 팔아버렸고, 영혼이라고는 지녀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바로 이 사실, 등을 맞댄 희극과 비극이 주인공들을 우롱하며 짓누르는 장치 자체가 작품의 키워드인 '캐치-22'입니다. '캐치-22'는 미치광이는 군 복무에서 해제될 수 있지만,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아는 미치광이는 미치광이가 아니므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모순된 조항입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빠져나갈 길이 없는 어그러진 현실 속에서 요사리안과 동료들은 구원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그 몸부림이 스치는 곳에서 태어난 조각들이 서서히 들어맞아 한 장의 그림으로 완성될 때, 요사리안은 '캐치-22' 밖으로 탈출을 감행합니다. "뛰어!"라는 외침과 함께 달려가는 요사리안의 모습은 <트루먼 쇼>의 엔딩 장면과 닮았습니다. "신의 은총이 내리소서." 요사리안이 웃었다.
"난 강렬한 후회가 없는 삶은 바라지 않아요." |
카테고리
이글루 파인더
최근 등록된 덧글
오랜만에 덧글 남깁니다...
by 당근 at 08/19 노르웨이의 숲 영화는 잘 .. by 나르실 at 08/04 한길세계문학 시리즈 목차.. by EREBUS at 07/11 주신 슌킨쇼는 정말 좋았.. by 치이나 at 07/04 아아 하긴...크게 흥행은.. by 루리루리 at 07/04 영화가 개봉해서 그런 거 .. by 치이나 at 07/04 Starless님/ 네...게임.. by 루리루리 at 07/04 코즈믹 환타지! 와와와~ by 나르실 at 06/28 저 시기에 나온 SF모험.. by Starless at 06/28 시절이 하수상하여 (실은 .. by 나르실 at 06/05 최근 등록된 트랙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