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
19세기 후반 외교관으로 서울에 머물렀던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은 3,821종의 한국 서적을 분석하여 문화사적 설명을 덧붙인 <한국서지>(韓國書誌, Bibliographie Coréenne)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앙리 코르디에의 <중국서지> 및 오스카 나호스트의 <일본서지>와 더불어 서양인이 펴낸 3대 동양서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요, 국내에서는 1994년 일조각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922쪽 4만 원의 거한 책이에요)

이 <한국서지>에는 서지학 정보는 물론 한국의 인쇄술이 유럽보다 앞섰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의 풍경 등 흥미로운 기록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중에서 조선의 대중소설에 대한 기록이 꽤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무대의 장소가 어떻든 간에 이러한 작품들의 공통점은 많으며 명백하다. 즉 성격연구가 없고 인물들이 언제나 똑같아,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학생이나 적을 무찌르는 젊은 전사, 재색을 겸비한 처녀, 젊은이들의 행복에 반대하는 부모, 처녀를 탐내는 고약한 벼슬아치와 정체가 드러나는 그의 중상(中傷), 자애로운 고관, 전술과 도술에 뛰어난 승려, 이러한 똑같은 유형들이 어디서나 나와 이내 구면이 되어버린다.

줄거리는 단조롭다. 즉 젊은이들이 결혼하는 것으로 매듭이 지어진다든가 또는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아들을 찾게 된다든가 하는 이야기이다. 사건이 겹치고 전쟁·유괴·파선·꿈·신기한 조짐·중상·유배 등이 쉴새없이 연속된다.

...가끔 한국 드라마를 볼 때마다 느꼈던 기시감의 뿌리가 여기에 있었군요. 플롯 자체야 대중서사의 한 전형이라 볼 수 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양산의 파워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듯.
by 루리루리 | 2007/11/07 09:49 |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azalea822.egloos.com/tb/166327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mycecilia at 2007/11/08 21:53
프랑스의 근대소설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 부르주아의 정치세력화와 그 세력화의 구심점이 된 신문이라는 매체가 있다면, 조선의 대중소설이 중세로맨스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배경에는 그 두 축이 부재했던 게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남한의 문학이 빌빌거리고 있는 원인 역시 그런 정신의 근대화과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있을 법 했던 기회는 분단으로 남북 모두 공히 날려먹었고요.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봉오리째로 고사해버린 모양새가 떠오릅니다.
Commented by 루리루리 at 2007/11/11 15:36
"근대소설이 세계인식을 언어형상으로 표출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혹자(누구의 말인지 기억이 안 나서...)의 말을 생각할 때, 스스로 주체화과정을 밟지 못해 불구가 된 것은 한국 문단만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옆동네 일본만 해도 '폐색된 시대'인 에도 때까지 민중들은 기뵤시ㆍ샤레본 같은 외설적인 문학을 통해 욕구를 분출하는 것밖에 길이 없었죠. 그러다 '인식'이 부재하는 상태에서 급격히 '세계'가 밀려들어오자 급히 '주체라는 허상'을 만들어 세우려 했고, 그나마도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국가'에 잠식당하자 개인은 자신의 내부로 기어들어 사소설이라는, 일종의 도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본을 통해 수동의 피동형으로 '근대화'한 한국의 경우는 오죽할까요...극복해야 할 '근대적 주체'가 애초에 기형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도 어불성설이고요. 절름거리며 발악하기보다 맘 편히 무국적성을 택한 일본이나, 그런 일본문학을 재차 모방하거나 자폐성에 침잠해버린 한국이나 참 안타까운 모양새입니다.

:         :

:

비공개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