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WAYS~3번가의 석양

처음 '일ㆍ인ㆍ페' 일정표를 봤을 때는 오늘 스폰지하우스에 가서 이 <3번가의 석양>을 시작으로 <첫사랑>, <인 더 풀>, <파빌리온 살라만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까지 종일 보고, 다음 주말에 <키사라즈 캐츠아이>를 비롯한 나머지를 싹 쓸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감기에 걸린 데다가 오후에 약속이 생겨서...아침 일찍 나가 <3번가의 석양>만 보고 아쉽게 돌아왔습니다.

원체 지식도 상식도 없고 견문도 짧은 터라 이 영화의 원작이 유명한 만화라는 것도, 호리키타 마키가 도호쿠 사투리를 쓰는 순박한 시골 소녀로 등장한다는 것도, 2005년 일본 아카데미를 휩쓴 화제작이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니, 그런데 '인디필름'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나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순수하게 울다가 웃다가 감동할 수 있었으니까요.


영화의 배경은 1958년. 아직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지만 사람들은 하루하루 올라가는 도쿄타워를 보며 번영의 예감을 그리고, 전차가 유유히 도로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그 곁을 스쳐가는 자동차의 수는 날로 늘어갑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존의 훈장을 가슴에 단 듯 씩씩한 3번가 사람들은 오늘도 옹기종기 붙어앉아 싸우고, 웃고, 인정을 나누며 일상을 쌓아올립니다.

성격은 불 같지만 본성은 착한 자동차 정비사 스즈키 노리후미(츠츠미 신이치). 그는 이력서에 적힌 '특기 : 자전거 수리'를 '자동차 수리'로 잘못 보고 순박한 소녀 무츠코(호리키타 마키)를 조수로 채용합니다. '자동차 회사'라는 말에 속아 상경한 무츠코는 기름때에 찌든 좁은 정비소에서 볼트를 조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즈키와 대판 싸우기도 하지만, 스즈키 일가의 따뜻하고 활발한 품성에 이끌려 어느새 한 가족으로 어우러집니다.

스즈키 부부(왼쪽: 스즈키 토모에-야쿠시마루 히로코)

한편 아동지에 3류 모험소설을 연재하며 생계를 잇는 작가 지망생 차가와 류노스케(요시오카 히데타카)는 매력적인 술집 아가씨 히로미(코유키)의 꼬드김에 넘어가 히로미 친구의 아들 준노스케(스가 켄타)를 떠맡게 됩니다. 갈 곳 없는 준노스케를 박대하던 차가와는 준노스케가 그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이 어린아이에게 뜻밖에 훌륭한 스토리텔러의 재능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준노스케의 스토리를 그대로 베껴 쓰는 등 뻔뻔스런 짓까지 하던 차가와는 점차 준노스케에게 따뜻한 애정을 품게 되고,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히로미도 차가와에게 이끌립니다.

"우리 세 사람...정말로 함께 살까요?"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닌 히로미, 준노스케, 차가와.

이렇게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시대의 풍경이 겹쳐집니다. '콜라'라는 음료가 새로 나왔다며 맛있게 마시는 담배가게 아줌마에게 "간장 다 마시고 확 죽어버려라"라고 투덜대는 스즈키 씨, 스즈키 씨네 집에 텔레비전이 처음 들어오던 날 우르르 몰려와 역도산의 시합을 보며 열광하는 마을사람들, 집집마다 냉장고가 들어오자 쓴 표정을 지으며 페달을 밟는 얼음장수 아저씨...

텔레비전이 들어오던 날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입니다. 일본영화다운 은근함은 찾아볼 수 없고, 말도 행동도 감정도 솔직하게 우르르 쏟아집니다. 울어야 하는 타이밍에는 "괜찮아, 이런 장면에서는 당연히 울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고, 웃긴 장면에서는 "웃으라고 넣은 장면이니까 마음껏 웃으라고!"라며 충동질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는 이런 꾸밈없는 솔직함이 잘 어울립니다.

함께 간 아가씨는 "마치 연극 같았다"라고 했는데, 적절한 평이라고 생각해요. 준노스케의 출생의 비밀, 히로미와 차가와의 사랑과 이별, 차가와가 준노스케에게 느끼는 뜨거운 부정(父情)은 자칫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것이 될 수도 있는데 에두름 없이 눈앞에 달려들기 때문에 연극을 보듯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 놓인 한 장의 막이 걷히고 배우들의 희로애락이 투명하게 와 닿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부분에서는 절제를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부끄러워집니다. 3번가에서는 사랑도, 분노도, 눈물도, 웃음도 분명하고 큼직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거든요.


나쁜 사람도 없고, 크게 비극적인 사건도 없고, 슬픔도 곧 기대와 희망으로 바뀌는 세계.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펑펑 오고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의 방에 찾아가 선물을 놓고 저녁에는 아름다운 석양이 짙게 깔리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들이 가족처럼 뜨겁게 서로를 끌어안는 세계. 그런 세계는 동화일지도 모릅니다. 혹자의 평대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외면하고 번영에 대한 향수만을 내세우는' 무책임한 드라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의뭉과 계산이 미덕으로 통하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꾸밈없는 감정에 젖을 수 있다면, 그게 두 시간짜리 환상이라 해도 저는 기꺼이 취할 거예요.


덧 : <철콘 근크리트>는 매진이더군요. 함께 간 아가씨는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이거 오타 아냐?"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답니다. ^^
by 루리루리 | 2007/06/30 17:50 | 영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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