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루쉰은 불후하다. 오직 그만이 중대한 역사적 깊이를 가진 중국 지식인의 길과 성격문제를 자각적으로 의식하고 예견했다. 아울러 그들이 지속적 투쟁과 자아계몽이라는 이중 임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중국혁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리쩌허우, <중국근대사상사론>

나의 여러 책에 수록된 노신(루쉰)에 관한 글들에서 자주 언급하였지만 나의 글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노신의 그것이에요. 글의 기법, 문장미,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 은유, 풍자, 해학, 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 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리영희, <대화>

오래 전부터 저는 나쓰메 소세키, 루쉰, 이광수를 비교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귀차니즘도 귀차니즘이거니와 제대로 쓰려면 상당히 큰 일이 될 것 같아 미루고만 있습니다. 이름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책 두어 권만으로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다라고 단언하여 무지와 편협을 드러내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아서요. 더구나 요즘 <루쉰소설전집>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셋은커녕 루쉰 한 사람에 대해 쓰는 것마저도 지금의 제게는 무리입니다. 입을 떼어봤자 그의 옷깃만 더듬는 식으로 추상적인 눌변을 늘어놓게 될 것 같아요.

루쉰 하면 국내에는 보통 <광인일기>나 <아Q정전> 정도만 알려져 있지만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면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은 힘과 깊이가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쿵이지>의 주인공 쿵이지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은 낙오자입니다. 유학이 타파해야 할 구습으로 전락한 문명의 전환기에 쿵이지는 하루하루 힘겹게 벌어먹다 마침내 도둑질로 생계를 잇는 신세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학자의 고고한 자세를 지켜 오히려 더 웃음거리가 되고, 술집에서 어린아이들을 붙들고 한자를 가르치려 하지만 무시와 비웃음만 삽니다.

"자네 또 남의 물건을 훔친 게로군."

쿵이지는 눈을 부릅뜨면서 대답한다.

"왜 또 터무니없이 남의 청렴을 더럽히려 하는고...?"

"청렴이라고? 내가 엊그제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자네가 허(何)씨 댁의 책을 훔치다 들켜 거꾸로 매달려 매맞고 있는 걸!"

쿵이지는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이마에 퍼런 힘줄을 세우면서 열심히 변명을 한다.

"책을 훔치는 건 도둑질이라고 할 수 없지...책을 훔치는 건...독서인(讀書人)이 하는 일이야. 어떻게 훔쳤다고 말할 수 있나?"

그리고 잇달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하는데, '군자는 원래 가난하다'라느니, 무슨 '...이리오' 등의 문자를 중얼거려서, 모두들 껄껄대고 웃도록 만들고 그러면 가게 안팎에는 유쾌한 분위기가 가득 차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술집에 나타나지 않던 쿵이지가 간만에 찾아옵니다. 책 한 권 살 돈도 없어 계속 도둑질을 하던 쿵이지는 마침내 호되게 걸려 병신이 될 정도로 두들겨맞은 뒤였습니다. 화자인 소년은 술값을 계산하다가 쿵이지의 손이 흙투성이인 것을 발견합니다. 다리가 부러진 쿵이지는 걸을 수도 없어 땅을 짚고 기어서 술집까지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엉금엉금 기어 돌아가는 쿵이지의 뒷모습을 보고 폭소를 터뜨리고, 그 뒤 다시는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쿵이지는 아마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라는 담담한 한 문장으로 소설이 끝납니다.

또 다른 단편 <약>은 자못 귀기까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부패한 청나라 정부를 향해 민중의 권리를 부르짖은 한 청년이 무참하게 처형됩니다. 라오수안 노인은 사형수의 피를 섭취하면 폐병이 낫는다는 속신을 믿고 폐병 환자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죽은 청년의 피로 적신 만두를 아들에게 먹입니다. 노력도 소용 없이 아들은 죽고, 얼마 뒤 슬픔에 잠긴 노인의 아내가 아들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옆에 묻힌 이는 다름아닌 문제의 사형수였으며, 그 무덤에도 사형수의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같은 자리에 선 두 여인은 사형수의 무덤 위에만 붉은 꽃이 무성하게 핀 것을 발견합니다. 사형수의 어머니는 그 꽃이 아들의 원한이 피어난 것이라 확신하고, 무덤가의 까마귀를 가리키며 "네가 여기에 있어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저 까마귀를 네 무덤 위로 날게 하여 나에게 보여다오"라고 외칩니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아무 일도 없자 두 여인은 돌아섭니다. 그런데 그들이 막 발을 옮겨놓으려는 순간, 가지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길게 울고 무덤 위로 날아올라, 먼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루쉰(魯迅, 1881~1936)

리쩌허우는 루쉰이 사회적ㆍ역사적 내용을 지닌 고독과 비애를 항시 품고 있었고, 그래서 독특한 개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위대한 계몽가인 동시에 계몽을 초월하여 '용사의 정신으로 송가를 불렀다'고 평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불후의 존재가 된 루쉰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투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중국인의 마비상태를 깨닫고 문학에 뛰어들었지만, 거대한 민족을 깨우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스스로를 확인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펜을 던지고 칩거한 그에게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옵니다.

"내 생각엔 자네가 글을 좀 썼으면 해..."

나는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엔 특별히 찬성하는 사람도, 그렇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필시 그들도 아마 적막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말했다.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사멸되어가고 있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초를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이것이 처녀작인 <광인일기>이다.

루쉰은 "내가 겪기에 고통스러웠던 적막감을, 내 젊은 시절과 같이 꿈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결코 다시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한 줄기 의무감으로 다시 일어난 루쉰은 '적막 속에서 치닫는 용사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고 그들이 앞장 서서 달려가는 데 거리낌이 없게 하고자' '용맹스러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증오스러운 것인지, 가소로운 것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는' 함성을 내지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루쉰의 첫 함성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사람을 잡아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혹 아직도 있을는지? 아이들을 구해야지...
by 루리루리 | 2007/06/16 00:45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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